콥틱기독교

곱트교회는 그들의 기원을 서기 248년으로 삼는다. 이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로 많은 순교자들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콥트 기독인들은 대부분 나일강 중상류 지역에서 살고 있다. 1800년대 중반부터 이뤄진 이집트 개신교의 역사는 이들 콥트 기독인에게 그 뿌리를 두고 있다. 회심자 대부분이 모슬렘이 아닌 콥트 기독인 출신이다. 오랜 기간의 박해를 견디며 중동지역의 가장 많은 교회를 존재케 한 콥트교회는 아랍선교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비록 이들이 마리아와 성자들을 숭배하는 등 개신교의 교리와 부딪히는 부분이 있지만 콥트교회 안에 성경공부운동이 일어나는 등 긍정적인 분위기도 있다.

◇콥트교회의 두 기둥=엄격한 예배의식과 콥트 기독인들을 응집케 하는 교황의 권위와 지도력,사막에 운둔하며 많은 영적인 지도자들을 배출한 수도원의 영성은 오늘날의 콥트교회를 지탱해주는 힘이다. 콥트교회의 교황인 바바 슈누다(바바란 이집트어로 아버지란 뜻)와 마카리우스 수도원의 마타가 바로 그 두 기둥이라 할 수 있다.

콥틱교회의 슈누다 교황은 어느 때이든 성도들이 질문하는 것을 허락한 최초의 교황이다. 성경강해 시간이 시작되면 성도들의 질문이 적힌 작은 쪽지들이 교황에게 전달된다. 교황은 가끔 유머를 섞어가며 모든 사람의 질문에 대답한다. 슈누다 교황은 1960년대부터 시작된 콥트 신학교교육을 새롭게 확장시켜나가 신학생 수를 3배나 늘렸다. 1900년에서 1961년 사이에 500명의 신학생들이 배출된데 비해 1964년부터 1994년까지 배출된 신학생은 2300명에 이른다. 그들 중 주교가 된 사람들도 많다.

한편 마타는 초기 교회 선배들의 엄격한 연구에 기초를 두고 영적인 발전을 도모했다. 많은 이들이 수도사적인 삶에 동참했고 개혁적 수도사 그룹을 형성했다. 마타는 1969년 6명의 고령의 수도사들만이 있는 마카리우스 수도원을 재건해줄 것을 부탁받았다. 당시 대부분의 건물은 붕괴됐으며 주위의 땅 또한 방치됐었다. 현재 마카리우스 수도원은 농업프로그램으로 풍성함을 누리고 수도사들도 100명에 달한다. 또 100여권의 콥트 신앙문서를 발간했다.

◇콥트의 관습들= 콥트교회는 초대교회 당시부터 전혀 변하지 않고 이어져 오는 것이 많다. 우선 콥트교회의 교황 선출은 최초에 모든 콥트교도가 투표를 해 교황 후보 10명을 정한다. 그후 5000명의 콥트교도가 투표에 참가,후보를 2명으로 좁힌다. 최종 결정은 하늘의 뜻이기 때문에 예배를 드리고 나서 어린이에게 제비뽑기를 시켜서 결정한다.

콥트교도에게 가장 중요한 행사는 부활절. 부활절 40일동안 그들은 단식을 한다. 고기류와 달걀은 금지돼 있으나 생선과 야채는 먹어도 된다. 콥트교도는 일생에 통과해야 할 몇가지 독특한 의식이 있다. 우선 아기가 태어나면 유아세례를 주고 콥트 계통의 이름을 지어준다. 다음엔 콥트교도라는 증거로 한쪽 팔목 안쪽에 십자가 모양을 새겨놓는다. 이것은 산양 젖에 담가놓았던 바늘로 피부에 십자가 모양을 문신하는 것인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릴 때 겪었던 고통을 직접 느끼면서 콥트기독인임을 더욱 자각하기 위한 것이다.

◇콥트교회의 상황=근래 콥트교회 안에 놀라운 성령운동과 성경공부에 대한 노력 등이 있었다. 그러나 성도들이 이해할 수 없는 콥트어로 된 성경을 읽거나 기도문을 암송하기 때문에 성령의 감동이나 열매가 없다. 더구나 교인들을 빼앗길 것을 염려하는 지도자들은 개신교에 대해 경계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명목상의 기독인들로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가난한 기독인들은 모슬렘으로 개종하면 주어지는 보상금에 현혹되거나 모슬렘 이성을 만나 결혼하면 개종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지금도 하루에 30∼40명의 기독인들이 모슬렘으로 개종하고 있다.(국민일보 함태경기자)
Posted by 동그라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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