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규 2

전망 좋은 방 2009. 1. 14. 23:46
 
<박상주기자가 만난 21세기 개척자>
이승규 서울아산병원 일반외과 교수
肝이식 성공률 96%… 세계에 `仁術` 전도
박상주기자 sjpark@munhwa.com
중국 한말(漢末)의 전설적인 명의(名醫)였던 화타(華陀)의 솜씨는 어느 정도였을까. 무려 2000년 전, 화타는 이미 위장 절제수술을 시행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가 수술 때 환자의 통증을 줄이기 위해 사용한 ‘마비산(麻沸酸)’은 세계 최초의 마취제로 간주되고 있다.

화타의 환생일까. 울산의대 서울아산병원 일반외과의 이승규(56) 교수. 1994년 국내 최초 어린이 대상 생체 간이식, 1997년 국내 최초 성인 생체 간이식, 1999년 세계 최초 변형 우엽 생체 간 이식(간 왼쪽 부위보다 더 큰 오른쪽 부위를 이식하는 수술), 2000년 세계 최초 2대 1 간이식(두 사람의 기증자가 한 사람의 환자에게 간 일부를 제공하는 수술)….

그동안 집도한 1200여건의 간이식 수술중 96%를 성공시켰다. 미국과 독일, 일본 등지의 세계적 명문 간이식 센터의 수술 성공률은 80%대 초·중반 수준에 머물고 있다. 명실상부 ‘세계 최고의 칼잡이’인 것이다.

지난 12일 오후 5시30분쯤 서울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 식당에서 이 교수를 만났다. 녹색 수술복 위에 흰색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빗질하지 않은 반백의 머리, 얼굴의 절반을 덮은 두툼한 안경, 훤칠한 키에 큼지막한 손과 발…. 늦은 점심식사를 막 끝내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밀린 외래환자를 보느라 오후 5시가 다 돼서야 식사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간 이식수술은 중노동이다. 초긴장 상태에서 평균 15시간을 서 있어야 한다. 보통 오전 8시에 시작되는 수술이 다음 날 새벽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이 교수는 최고 36시간동안 수술하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이처럼 힘든 간 이식수술을 그는 매주 네 번씩 소화한다. 여기에 예정에 없던 응급환자 수술과 회진, 외래진료 등이 더해진다.

“아침 7시에 출근하면서 바로 가운으로 갈아입습니다. 정장이나 평상복을 입어볼 시간이 없어요.”

수술실에서 라면과 김밥으로 끼니를 때우고, 새우잠을 자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그래서 늘 신경이 쓰이는 게 체력이다. 애타게 삶을 갈구하는 환자들에게 이 교수의 체력은 곧 ‘생명줄’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틈만 나면 뜁니다. 수술실 옆 휴게실에 러닝 머신을 한대 들여 놨어요 외과의사는 하체가 부실해지면 끝장이거든요.”

이 교수처럼 정상을 달리고 있는 인물들을 만나면 늘 품게 되는 궁금증. 저런 사람들은 어떤 시련을 겪었을까.

“고려대 의과대학 구로병원 시절(1983~89년) 적지 않은 마음고생을 했습니다. 당시 구로병원에는 우석의대(현 고려대 의대)출신들이 많이 포진해 있었어요. 서울의대 출신인 나로서는 이른바 ‘텃세’라는 걸 감내해야 했습니다. 남들이 기피하는 외과를 전공으로 선택하게 된 것도 이런 저런 눈치를 봐야하는 상황에서 이루어진 ‘자의반 타의반’의 결정이었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럴수록 ‘파이팅 스피릿(Fighting Spirit, 근성)’ 같은 게 생기더라고요.”

이 교수는 자신이 이끄는 간 이식팀을 파이팅 스피릿으로 뭉친 ‘외인부대’라고 불렀다.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지닌 서울아산병원의 간 이식팀을 외인부대라고 부르는 이유는 뭘까.

“서울대나 연세대, 고려대 등 수도권의 명문 의대 부속병원들과 경쟁한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남들 한 시간 일할 때 두 시간 일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팀원 중 1년차들은 일주일에 한번만 외출이 허용됩니다. 그것도 토요일 밤에 나갔다가 일요일 오전 9시까지 복귀해야 합니다. 교수와 조교수, 전임강사들도 일주일에 세 번 정도는 병원에서 자지요.”

어느 분야건 정상의 자리를 오래 유지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는 벌써 10년 이상 세계 간 이식 분야 정상의 자리를 내놓지 않고 있다. 그 비결이 뭘까.

“지금도 매일 공부를 합니다. 오전 7시 팀 미팅 때 해외의 유명 의료저널을 놓고 스터디를 합니다. 팀원들이 돌아가면서 발제를 한 뒤 토론을 벌이는 ‘미니 세미나’를 여는 거지요.”

정상을 유지하는 또 다른 비결은 이 교수 ‘개인’의 의술을 팀의 ‘시스템’으로 정착시켰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수술중의 모든 부하(負荷)를 혼자 걸머져야 했지만 이젠 시스템의 도움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팀의 다른 선생님들도 이젠 궤도에 올랐습니다. 덕분에 예전보다 많은 환자를 진료할 수 있게 됐습니다.”

수년 전부터 이 교수는 세계 각국의 병원으로부터 ‘SOS’ 요청을 받고 있다. 지난 2001년 4월에는 세계 간이식 수술의 최고 권위자로 인정받고 있는 독일 에센병원의 브로엘시 박사로부터 ‘한 수 지도’ 요청을 받고 생체 간이식 수술을 시범 전수했다.

브로엘시 박사는 1992년 독일로 건너간 이 교수에게 처음 간이식 수술 가르쳤던 스승이었다. 불과 10년만에 사제(師弟)의 입장이 바뀐 것이다. 미국과 프랑스, 오스트리아, 일본, 터키 등 세계 유수의 간 이식센터에서도 의술 전수 요청이 잇따르고 있다.

이 교수의 마음은 ‘실패한 4%’ 때문에 늘 안타깝다. 수술을 시작하기 전 지혜와 힘을 달라고 간청하는 기도를 올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다른 병원에서 “도저히 가망이 없다”며 ‘사망선고’를 내린 말기 암 환자들이 찾아와도 차마 외면하지 못한다.

“우리마저 포기하면 그들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팀원들에게 우리 병원은 3차 진료기관이 아니라 4차 진료기관이라는 자부심으로 일하라고 격려합니다.”

그의 수술대에 오른 환자의 96%가 새 생명을 얻는다면 ‘이승규’라는 이름 석자 앞에 ‘21세기의 화타’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게 과장은 아닐 것이다. 나머지 4%는 신의 몫이 아닐까.


sjpark@munhwa.com



기사 게재 일자 2005-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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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주기자가 만난 21세기 개척자>
오늘의 그가 있기까지

박상주기자 sjpark@munhwa.com

이승규 교수는 어릴 적 크고 작은 병치레를 많이 했다. 다섯 살 때 일본 도쿄대에서 심장병 수술을 받기도 했다. 일본 의료계에서 실시한 심장병 수술의 첫 성공 케이스가 바로 그였다. 경기고 재학시절에는 장질부사에 걸려 6개월 동안 휴학을 해야 했다.

이 교수는 이처럼 자신이 자주 아팠기 때문에 의사의 길을 택한 듯하다고 스스로 짐작했다. 병원 문턱을 들락거리면서 의사들에 대한 친밀감 같은 게 생긴 듯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가 의사의 길을 가게 된 것은 “아들이 안정적인 전문인으로 편하게 살기를 원하는 어머니의 권유 때문”이라고 했다.

부모님 다음으로 이 교수의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인물은 민병철 전 서울아산병원장이었다.

이 교수는 서울대 의대 본과 1학년이던 1969년 당시 서울대 교수였던 민 원장을 처음 만났다. 이후 이 교수는 신영외과병원(1978~1983년), 고려대 의대 구로병원(1983~1989년), 서울아산병원(1989년~) 등의 원장을 맡았던 스승을 따라 항상 행동을 함께 했다.

“대장·항문 분야를 전공으로 생각하고 있던 제게 간 이식을 공부하라고 처음 권한 분이 선생님이었습니다. 1986년 고려대 구로병원에서 함께 근무하던 시절, 선생님께서 ‘미국으로 건너가 간 이식 기법을 배워봐라’고 하셨습니다. 편안한 돈벌이만 생각하고 있던 저에게 ‘인술’을 깨우쳐준 평생의 스승이지요.”

이 교수는 스승뿐 아니라 동기들도 유별나다. 성상철 서울대 병원장, 박제갑 국립암센터 원장, 이종철 삼성서울병원장, 이철 울산대 병원장, 박인숙 울산대 의대 학장 등이 모두 이 교수와 함께 공부한 서울의대 27회 동기들이다.

“하나같이 의사로서의 욕심이 많은 친구들입니다. 속된 말로 ‘지랄같다’는 말이 더 적절한 표현일 듯합니다.”

표현이 조금 지나쳤다고 생각했는지 이 교수가 빙그레 웃었다. 그 속엔 자신과 같은 길을 가는 스승과 친구들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담뿍 담겨 있었다.


▲1949년 서울 출생 ▲1967년 경기고 졸업 ▲1973년 서울의대 졸업 ▲1986년 서울대 의학박사 ▲1973년 서울대 부속병원 인턴 ▲1983~89년 고려대 의대 구로병원 전임강사, 조교수, 부교수 ▲1986년 7월~1987년 8월 미국 보스턴 레이 클리닉 및 뉴잉글랜드 디코네스 병원 연수 ▲1992년 3월~1992년 4월 독일 하노버 의과대학 간이식 연수 ▲1989년~현재 울산의대 서울아산병원 외과 부교수, 교수 ▲2002년~현재 울산의대 서울아산병원 장기이식센터 소장

기사 게재 일자 2005-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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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주기자가 만난 21세기 개척자>
외유내강형 카리스마
박상주기자 sjpark@munhwa.com
지킬 박사와 하이드. 영국 소설가 로버트 스티븐슨의 이 작품은 인간은 누구나 지킬 박사처럼 선한 측면과 하이드 같은 악한 측면을 함께 지녔음을 그리고 있다. 사람을 겉으로만 판단해선 안 된다는 얘기다.

이승규 박사는 일단 수술실에만 들어가면 ‘표변’한다는 게 병원관계자들의 말이다. 인터뷰 자리에 배석했던 병원 관계자의 말을 들어보자.

“언젠가 한번 수술실에 들어갔다가 교수님의 호통소리를 듣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평소 입에 담지 않던 험한 말로 레지던트 한명을 야단치더라고요.”

이 교수는 “내가 바로 ‘지킬 박사와 하이드’”라며 웃었다. 외모로만 본다면 그의 입에서 큰 소리가 나올 거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다. 아무리 뜯어봐도 남에게 싫은 소리 한마디 못할 것 같은 유순한 인상을 지녔기 때문이다.

“까딱 잘못했다가는 사람의 생명이 위태로워지는 상황입니다. 조그만 실수라도 용납할 수 없지요. 외과의사라면 초짜 시절 누구나 겪게 되는 험난한 과정입니다.”

마취팀, 수술실, 중환자실, 임상병리, 방사선과 등 간 이식과 연관된 40여명의 팀원들은 그의 말 한마디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겉 모습과는 달리 만만치 않은 카리스마를 지녔다는 얘기다.

“응급환자 수술 때문에 새벽 2~3시에 호출을 해도 군소리 없이 나옵니다. 묵묵히 따라주는 팀원들이 고맙지요.”

그렇지만 야단치는 만큼 다독거린다. 아버지 얼굴을 자주 보지 못하는 직원 가족들을 위해 연말이면 가족동반 위로 파티를 열어주기도 한는 게 그 한 사례다. 이 교수 자신도 부인 장유순(53)씨와 남매인 대윤(25), 지윤(23)을 보는 시간이 많지 않다. 주말마다 꼬박꼬박 함께 교회에 나가는 게 그나마 가족과 보내는 얼마 안되는 시간이다.



기사 게재 일자 2005-09-20
Posted by 동그라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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