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망 좋은 방'에 해당되는 글 10건

  1. 2010.02.14 Every Child Matters 광고
  2. 2009.12.27 천병희 교수 기고
  3. 2009.10.04 프라토의 중세 상인
  4. 2009.04.12 박노준 / 김건우
  5. 2009.01.14 이승규 2
  6. 2009.01.14 이승규
  7. 2009.01.14 간 이식수술 이승규 교수
  8. 2008.10.05 레나테 홍
  9. 2008.10.05 레나테 홍
  10. 2008.02.04 도널드 트럼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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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공부를 하는가]<33> 단국대 명예교수 천병희 호메로스가 原典번역으로 소개해달라고 등을 미는 듯 대학 때 플라톤에 매료, 그리스 고전에 심취 '동백림 사건' 옥살이 중에도 책 놓지 않아 아직도 우리말로 옮겨야 할 원전 수두룩

독일 유학시절. 왼쪽 끝이 필자, 그 옆은 임석진씨 


 고2 때까지 나는 남의 눈에 잘 띄지도 않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고 2때 만난 독일어 선생님이 좋아서 독일어 공부를 열심히 했고, 열심히 한만큼 결과가 나오니 점점 다른 공부에도 자신을 갖게 되었다. 겨울 방학 때는 고향에 가서 독일어 3000단어 숙어집을, 독일어로 물으면 우리말로 대답하고 우리말로 물으면 독일어로 대답할 수 있을 만큼 외웠다. 힘들고 지겨운 작업이지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해내면서 나는 비로소 공부에 끌려 다니지 않고 스스로 알아서 공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고3 여름방학 때는 영어 단어 숙어집도 이렇게 외우기 시작했다. 대학 입학 원서에서 나는 독문과와 언어학과와 철학과를 선택했는데 다른 학문 분야를 선택하면 내 길을 가지 않았다고 평생 후회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1학년 1학기에 친구가 권해서 그리스어 수강신청을 했는데 이것이 내가 그리스어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였다. 1학년 2학기에 접어들면서 차츰 그리스어에 반해 겨울 방학 때는 고향에 내려가 ‘그리스어 첫걸음(First Year of Greek)’이라는 책을 통독했다. 그것이 그 뒤 그리스어를 공부하는 데 큰 밑천이 되었다. 2학년 1학기부터 장익봉 교수의 플라톤의 ‘향연’ 강독을 들으면서 나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 친구들끼리 모여 사랑 국가 영혼불멸 등등 중대한 인생사에 관하여 묽은 포도주를 마셔가며 진지하고 격의 없이 토론하는 장면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장 교수와 3학년 때는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을, 4학년 때는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 9권을 읽었는데, 3학년 2학기 때는 같이 강의를 듣던 학우들이 모두 군에 입대한 까닭에 나 혼자서 강의를 들었다. 장 교수는 학생이 번역하는 것을 교정해주는 방법으로 강의를 하셨기 때문에 혼자서 학기 내내 강의를 준비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지만, 나중에 그리스어 원전과 씨름하는 데 적잖은 자신감을 주었다. 학교 강의와는 별도로 나는 또 한번 혼자서 일을 벌였다. 2학년 겨울방학 때 고향에도 내려가지 않고 학교 도서관에 틀어박혀 호메로스의’일리아스’를 그리스어로 읽기 시작했다. 첫날에는 온종일 50행 정도 읽었다. 그때만 해도 편리한 호메로스 사전이 있는 줄 몰라 옥스포드 희영사전을 뒤져 동사나 명사의 원형을 찾아 노트에 옮기는 고된 작업을 했는데 이미 플라톤을 읽으며 고대 그리스의 인간적인 사고방식에 심취해 있던 터라 내가 호메로스를 읽는 것을 아무도, 아니 나 자신도 말릴 수 없었을 것이다. 자나 깨나 내게는 호메로스뿐이었다. 호메로스 읽기는 방학 때는 물론이고, 학기 중에도 강의시간과 시험 때를 빼고는 계속되었다. 3학년 겨울방학 때 ‘일리아스’를 끝내고 ‘오뒷세이아’를 읽기 시작했다. 어느새 호메로스적 표현에 익숙해져 ‘오뒷세이아’ 읽기는 1년이 걸리지 않았다. 61년 독일 유학길에 올랐다. 첫 학기는 독일어 듣고 말하기를 배우고 두 번째 학기부터 그리스어 집중 코스와 라틴어 집중 코스를 듣기 시작했다. 4년을 기약하고 떠났기 때문에 독문학에 바로 들어가도 시간이 모자랄 텐데도 독일 대학에서 내 그리스어 실력을 검증받고 싶은 유혹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독일대학에서는 그리스어와 라틴어는 불가분의 관계였다. 강의는 가다머(Gadamer) 교수의 철학 강의를 많이 들었다. 그때 비로소 소크라테스 이전 그리스 철학자들의 존재도 알게 되었다. 그리스어 검정고시(Graecum)는 주당 5~6시간씩 2학기를 들어야 주정부 교육청이 시행하는 시험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진다. 나는 그리스어 실력을 다질 요량으로 수강신청을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시행한 첫 번째 모의고사에서 뜻밖에 1등을 하는 바람에 내친 김에 검정시험에도 응시하여 합격했다. 라틴어 검정시험(Latinum)은 ‘대’(大 grosses)와 ‘소’(小 kleines)로 나뉘는데 ‘대’는 신학이나 철학을 공부하려는 학생이, ‘소’는 의학, 경제학 등을 공부하려는 대학생이 거쳐야 하는 과정으로 수업도 ‘대’는 4학기를, ‘소’는 2학기를 이수해야 응시 자격이 있다. 나는 라틴어 ‘대’에 응시하여 중간 성적으로 합격했다. 어느 날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가르쳐준 개르트너 교수가 자기 집에서 저녁이나 하자며 초대해서 가보았더니 장학금을 얻어줄 테니 고전문학으로 학위를 해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의해왔다. 그러나 고전문학으로 학위를 하려면 10년도 더 걸릴 것이고, 그리스 라틴 문학을 전공해봤자 설 자리도 없고 남이 인정해주지도 않는다는 것을 잘 아는 처지라 며칠 고민 끝에 거절을 하였다. 그 사이 2년 반이란 시간이 흘러가 남은 시간은 1년 반밖에 없었다. 나는 학위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내가 평소 꼭 읽어보고 싶었던 문학 작품들을 탐독하기로 결심했다. 그때 마침 미국 프린스턴 대학에서 물리학 공부를 마치고 독문학을 공부하려고 독일에 온 유학생을 통해 프린스턴 대학에서 권장하는 100권의 필독도서 목록을 보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독일 대학에서는 공부하라고 들볶아대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분위기가 자유로운 데 반해 미국 대학에서는 학교에서 필독서 목록까지 만들어주며 그때그때의 과정이 요구하는 책을 읽지 않게 되면 학점이 나오지 않는다니 참으로 놀라웠다. 나는 그 목록을 참고하여 우선 독일 장편소설들을 읽기 시작했다. 괴테, 토마스 만, 도스토옙스키의 장편들을 거의 다 읽었고 슈티프터, 켈러, 카프카, 쟝 파울 등의 장편소설을 골라서 탐독했다. 독일어 명작 읽기 작업은 86~90년에 다시 계속해 레싱에서부터 렌츠에 이르기까지 희곡과 단편들과 현대 장편소설들을 추려서 읽었는데, 독일 한자(Hanser) 출판사의 독일고전 시리즈의 판형으로 따져 약 3만 쪽은 될 것이다. 요즘은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을 번역하고 주석을 달고 있다. 건강이 허락한다면 일흔까지는 번역을 계속하며 소포클레스와 아이스퀼로스의 전집을 내고 싶다. 김주성 기자. 5년 만에 귀국하여 나는 운 좋게도 그리던 대학 강단에 서게 되었으나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3년간 옥고를 치르고 10년 동안 자격을 정지당했다. 꼭 그런 가혹한 형벌을 내려 젊은 인재들을 망가뜨려놓았어야 하는지 아무래도 납득이 안 간다. 옥중에서도 나는 책 읽기를 계속하여 주로 을유문화사와 정음사에서 나온 세계문학 전집을 쉬지 않고 읽었다. 그곳에서는 시간이 남아돌아 사서삼경과 고문진보, 당송 팔가문 같은 중국 고전도 옥편을 뒤지고 주석을 참고하며 읽었고, 기독교의 신약성서와, 구약의 창세기와 ‘아라비안나이트’도 느긋한 마음으로 읽었다. 마침내 3년 2개월 만에 특별사면으로 집으로 돌아왔으나, 고통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부모형제와 친척들에게 죄송하고, 무엇보다도 생계가 어려웠다. 그때는 연탄 한 2백 장 재어놓고 쌀 한 가마 들여놓는 것이 그렇게도 부러웠다. 그때 선배의 주선으로 휘문출판사에서 플라톤의 ‘국가’ 6~10권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5~8권을 그리스어 원전에서 우리말로 번역했다. 72년에 나온 이 책이 나의 첫 그리스어 원전 번역이다. 이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과 아이스퀼로스의 ‘아가멤논’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도 번역을 했다. 1981년 자격정지 기간이 끝나면서 천신만고 끝에 대학에 돌아갈 수 있었으나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가 들어설 때까지는 늘 불안했다. 어쩌면 나더러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을 세계 12대 경제대국인 우리나라에도 이제는 원전 번역으로 소개하라고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와 3대 비극작가와, 로마의 베르길리우스, 오비디우스, 세네카, 키케로 같은 선현들이 뒤에서 나를 은근히 밀어준 것이 아닌가 하는 황당한 생각한 생각도 해보았다. 1982년에는 드디어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낼 수 있었다. 본격적으로 그리스어 원전 번역에 착수한 것은 1990년대에 들어서였다. 원전번역은 워낙 방대한 작업이라 정년퇴직 후에나 착수할 생각이었으나 시력이 감퇴되어 미루다간 영영 못할 것 같았다. 정년퇴직한 후에는 해외여행이나 다니고 역사와 그리스 미술에 관한 책과 영웅전이나 조금씩 읽으면서 슬슬 만년을 즐겨볼까 하다가 다시 번역작업을 시작해 하루 6시간 정도 번역에 몰두하고 있다. 내게는 어떤 여행도 독서에 의한 지적인 여행보다 즐겁지 못하고, 아무리 맛있는 음식과 아름다운 경치도 책 속의 깊은 사상과 멋있는 표현을 곱씹어보는 것만큼 감미롭지가 않기 때문이다. 시 드라마 신화 철학 역사 지리 의학 수학 조각 건축 도서관 민주주의 의회 투표 올림픽 포도주 등 서양의 좋은 것들은 대부분 고대 그리스의 문화유산이다. 따라서 서양문화의 원형을 이해하려면 그 원천인 그리스 정신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거기에 이르는 확실한 지름길은 그들이 남긴 기록과 유산부터 올바로 파악하는 것이다. 거기에 그리스 고전 연구의 의미가 있다. 이제 우리나라도 먹고 살만하니 문화적으로도 선진국에 진입하려면 이 분야의 전문가들을 양성하여 그리스 로마 고전 200권 정도는 하루 빨리 우리말로 옮겨야 할 것이다. 그것은 교육부와 문화부의 책무이며, 이를 강 건너 불 보듯 하는 것은 심각한 직무유기이다. 천병희 단국대 명예교수는… 천병희 단국대 명예교수는 그리스 라틴문학을 원전에서 번역하는 국내 최고의 전문가로 손꼽힌다. 지금까지 40여종의 그리스 라틴 고전을 우리말로 번역했다. 1 939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났으며 서울대 독문과를 나오고 대학원에 재학중이던 61년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유학을 갔다. 이곳에서 독문학을 공부하면서 동시에 그리스어와 라틴어도 자격고시에 붙을만큼 공부를 했다. 67년 귀국하던 해에 서울대 사범대 독어교육과 전임강사로 부임했으나 독일 유학 중 북한을 방문한 것이 빌미가 되어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어 3년형을 살았다. 81년에 단국대 독문과 교수로 부임, 2004년까지 재직했다. 단국대 교수로 재직중 독문학으로 서울대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가 옮긴 작가로는 호메로스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아리스토파네스 크세노폰 이솝 메난드로스 헤시오도스와 오비디우스 베르길리우스 키케로와 세네카 등을 망라한다. <한국일보 입력시간 : 2005/11/07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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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토의 중세 상인 이리스 오리고 지음|남종국 옮김|앨피|680쪽|2만8000원 1870년 이탈리아 피렌체 근처 소도시 프라토의 저택 구석방에서 먼지가 켜켜이 앉은 자루가 발견됐다. 500여권의 원장(元帳)과 회계장부, 300여장의 동업 계약서, 환어음, 보험증서, 선하증권, 개인 수첩, 수표와 함께 14만통의 편지가 나왔다. 14세기 프라토의 거부(巨富) 프란체스코 디 마르코 다티니(Datini·대략 1335~1410년)가 남긴 방대한 기록이었다. 젊은 시절 교황청이 있던 아비뇽에 건너가 장사로 큰돈을 번 프란체스코는 1383년 고향 프라토에 돌아온 이후에도 피렌체, 피사, 제노바, 에스파냐, 마요르카 등에 지사를 두고 무역사업을 확장시켜 나갔다. 프란체스코는 기록광이었다.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빵 한 조각만 먹으며 이틀 밤낮으로 쓰기에 몰두할 정도였다. 그는 평생 자기가 받은 편지와 사업 기록을 모았고, 지점 관리인들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명했다. 그리고 이 모든 기록을 한데 모아 자기 집에 보존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프란체스코의 기록이 발굴되면서 중세 지중해 무역의 실상을 세밀하게 들여다보는 일이 가능해졌다. 그의 기록은 르네상스 시대 초기 경제뿐 아니라, 정치와 문화, 복식, 음식, 언어, 일상생활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 경쟁을 촉발시켰다. 프라토의 저택에 소장된 프란체스코 초상화(사진 왼쪽).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 지방의 소도시 프라토 광장에 서 있는 프란체스코 디 마르코 다티니 동상. 왼손에 환어음 뭉치를 내밀고 있다(사진 오른쪽)./엘피 제공 아일랜드 출신 미국 여성 역사학자 오리고(Origo)는 14만통이나 되는 프란체스코의 편지 가운데 사생활을 담은 11만통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 그는 프란체스코의 성공적인 사업 수완뿐 아니라 부부의 결혼 생활, 집안 살림, 농장, 음식과 약, 흑사병과 참회 등 14세기 사람들의 일상을 촘촘하게 그려내고 있다. 오리고가 프란체스코 부부의 결혼 생활을 상세하게 묘사할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이게도 이 부부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아 오랫동안 별거를 했기 때문이다. 프란체스코는 스무살이나 아래인 아내 마르게리타에게 집안 대소사를 시시콜콜 잔소리했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을 잊지 말고 하고, 포도주 통을 잘 관리하고 가축을 잘 먹이시오. 매일 저녁 문을 잘 잠그고 불을 껐는지 확인하시오." 아내는 매일 남편 지시에 따라 집안일을 처리해야 했고, 결과를 알리는 편지를 썼다. 프란체스코는 아내의 일 처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친구 부인과 비교하는 글을 썼다. "귀도의 부인은 남편과 함께 산 34년 동안 남편을 성가시게 한 적이 없다오." 아내는 남편에게 "아내를 여관집 주인아줌마가 아니라 한 여성으로 대우해달라"며 항변했다. 마르게리타는 남편에게 당당히 맞서고 남편의 잘못을 과감하게 지적하는 여장부였다. 프란체스코 기록에는 마르게리타가 쓴 편지가 100통 넘게 포함돼 있다. 다티니는 평생 돈을 좇았고, 노예와 하녀들에게서 사생아를 낳는 등 방탕한 생활을 했으며, 음식을 절제할 줄 몰랐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인색하게 굴고, 힘있는 이들에게는 아부하는 그런 인물이었다. 그런 그도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행복하게 살지 못했다고 고백할 만큼 불행한 인생을 살았다. 프란체스코의 회계장부는 '신(神)과 이윤의 이름으로'라는 글귀로 시작한다. 당시 상인들의 삶을 좌우하던 목표가 돈과 신앙이었던 것을 보여준다. 평생 돈벌이에 집착하며 엄청난 부를 쌓았던 프란체스코의 노년을 괴롭혔던 것은 죄의식과 구원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1410년 8월 16일 프란체스코가 세상을 떠나면서 평생 모은 10만 피오리노에 달하는 엄청난 재산을 프라토의 빈민들에게 넘겨주고 신의 용서와 구원을 청한 것도 이 때문이다. 오리고는 프란체스코를 현대 기업인의 원조로 꼽는다. 다양한 사업 범위와 조직력, 국제적 안목과 변화에 대응하는 능력, 야망과 통찰력, 끈기와 욕심 등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조선일보 2009.9.19 김기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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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afe.naver.com/mamj8836.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15285

 박노준, 김건우 .....당시 고교야구는 지금의 어떤 스포츠보다 더 큰 인기가 있었다.
 당시 선린상고의 야구경기는 엄청 재미있었다. 물론 나야 변함없는 광주일고
 팬이었지만...

 그들이 프로리그로 간 뒤로는 솔직히 잘 모른다. 당시에 나는 신문 스포츠면은
 그냥 건너 뛰고, TV도 보지 않았으니까...
 
 나중에 알게된 것은...
 박노준은 고등학교, 대학교(고려대) 때 투수로서 혹사 당해 어깨가 망가졌고,
 이후 프로리그 들어와서도 그후 잦은 부상으로 인해서, 선수생활이 끝났다.
 
http://blog.naver.com/stuff95?Redirect=Log&logNo=100000646740

 윗 링크에 나와있는 안타치고도 쩔뚝거리다가 1루에서 아웃되는 모습,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눈 앞에 선하다.  

 반면 김건우는 신인다승 (18승), 다음해에도 12승을 올리며 승승장구하던 중,
 대치동에서 새벽 0시30분에 길을 건너다가 과속 질주하던 차에 치였다.
 아마도 술 먹다가 그랬을 것 같은데, 이후 제대로 된 선수생활을 하지 못했다.

 인생이란 이와 같은 것이지만......또 그렇게만 쉽게 단정지을 수 없는 무엇이  
 있다...  

 박노준과 김건우의 삶이 그것으로 끝장났을 것 같지만, 여전히 그들의 삶에는
 가족, 친구, 직장, 사회 등등에서의 다양한 에피소드가 있고, 그들은 그 안에서
 사랑, 슬픔, 기쁨 ,  좌절, 분노, 희망, 성취....를 느끼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내 인생이 허무하다는 생각, 이렇게 살다가 어느날 늙어서 그냥 사라지기는 싫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 인생 안에 소중한 것들이 여전히 생동하고 있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되겠다.

 ps. 제일 위에 링크된 곳은 김건우와 박노준 검색하다가 알게된 카페인데,
      여기 가입해야 겠다. 재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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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규 2

전망 좋은 방 2009. 1. 14. 23:46
 
<박상주기자가 만난 21세기 개척자>
이승규 서울아산병원 일반외과 교수
肝이식 성공률 96%… 세계에 `仁術` 전도
박상주기자 sjpark@munhwa.com
중국 한말(漢末)의 전설적인 명의(名醫)였던 화타(華陀)의 솜씨는 어느 정도였을까. 무려 2000년 전, 화타는 이미 위장 절제수술을 시행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가 수술 때 환자의 통증을 줄이기 위해 사용한 ‘마비산(麻沸酸)’은 세계 최초의 마취제로 간주되고 있다.

화타의 환생일까. 울산의대 서울아산병원 일반외과의 이승규(56) 교수. 1994년 국내 최초 어린이 대상 생체 간이식, 1997년 국내 최초 성인 생체 간이식, 1999년 세계 최초 변형 우엽 생체 간 이식(간 왼쪽 부위보다 더 큰 오른쪽 부위를 이식하는 수술), 2000년 세계 최초 2대 1 간이식(두 사람의 기증자가 한 사람의 환자에게 간 일부를 제공하는 수술)….

그동안 집도한 1200여건의 간이식 수술중 96%를 성공시켰다. 미국과 독일, 일본 등지의 세계적 명문 간이식 센터의 수술 성공률은 80%대 초·중반 수준에 머물고 있다. 명실상부 ‘세계 최고의 칼잡이’인 것이다.

지난 12일 오후 5시30분쯤 서울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 식당에서 이 교수를 만났다. 녹색 수술복 위에 흰색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빗질하지 않은 반백의 머리, 얼굴의 절반을 덮은 두툼한 안경, 훤칠한 키에 큼지막한 손과 발…. 늦은 점심식사를 막 끝내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밀린 외래환자를 보느라 오후 5시가 다 돼서야 식사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간 이식수술은 중노동이다. 초긴장 상태에서 평균 15시간을 서 있어야 한다. 보통 오전 8시에 시작되는 수술이 다음 날 새벽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이 교수는 최고 36시간동안 수술하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이처럼 힘든 간 이식수술을 그는 매주 네 번씩 소화한다. 여기에 예정에 없던 응급환자 수술과 회진, 외래진료 등이 더해진다.

“아침 7시에 출근하면서 바로 가운으로 갈아입습니다. 정장이나 평상복을 입어볼 시간이 없어요.”

수술실에서 라면과 김밥으로 끼니를 때우고, 새우잠을 자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그래서 늘 신경이 쓰이는 게 체력이다. 애타게 삶을 갈구하는 환자들에게 이 교수의 체력은 곧 ‘생명줄’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틈만 나면 뜁니다. 수술실 옆 휴게실에 러닝 머신을 한대 들여 놨어요 외과의사는 하체가 부실해지면 끝장이거든요.”

이 교수처럼 정상을 달리고 있는 인물들을 만나면 늘 품게 되는 궁금증. 저런 사람들은 어떤 시련을 겪었을까.

“고려대 의과대학 구로병원 시절(1983~89년) 적지 않은 마음고생을 했습니다. 당시 구로병원에는 우석의대(현 고려대 의대)출신들이 많이 포진해 있었어요. 서울의대 출신인 나로서는 이른바 ‘텃세’라는 걸 감내해야 했습니다. 남들이 기피하는 외과를 전공으로 선택하게 된 것도 이런 저런 눈치를 봐야하는 상황에서 이루어진 ‘자의반 타의반’의 결정이었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럴수록 ‘파이팅 스피릿(Fighting Spirit, 근성)’ 같은 게 생기더라고요.”

이 교수는 자신이 이끄는 간 이식팀을 파이팅 스피릿으로 뭉친 ‘외인부대’라고 불렀다.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지닌 서울아산병원의 간 이식팀을 외인부대라고 부르는 이유는 뭘까.

“서울대나 연세대, 고려대 등 수도권의 명문 의대 부속병원들과 경쟁한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남들 한 시간 일할 때 두 시간 일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팀원 중 1년차들은 일주일에 한번만 외출이 허용됩니다. 그것도 토요일 밤에 나갔다가 일요일 오전 9시까지 복귀해야 합니다. 교수와 조교수, 전임강사들도 일주일에 세 번 정도는 병원에서 자지요.”

어느 분야건 정상의 자리를 오래 유지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는 벌써 10년 이상 세계 간 이식 분야 정상의 자리를 내놓지 않고 있다. 그 비결이 뭘까.

“지금도 매일 공부를 합니다. 오전 7시 팀 미팅 때 해외의 유명 의료저널을 놓고 스터디를 합니다. 팀원들이 돌아가면서 발제를 한 뒤 토론을 벌이는 ‘미니 세미나’를 여는 거지요.”

정상을 유지하는 또 다른 비결은 이 교수 ‘개인’의 의술을 팀의 ‘시스템’으로 정착시켰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수술중의 모든 부하(負荷)를 혼자 걸머져야 했지만 이젠 시스템의 도움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팀의 다른 선생님들도 이젠 궤도에 올랐습니다. 덕분에 예전보다 많은 환자를 진료할 수 있게 됐습니다.”

수년 전부터 이 교수는 세계 각국의 병원으로부터 ‘SOS’ 요청을 받고 있다. 지난 2001년 4월에는 세계 간이식 수술의 최고 권위자로 인정받고 있는 독일 에센병원의 브로엘시 박사로부터 ‘한 수 지도’ 요청을 받고 생체 간이식 수술을 시범 전수했다.

브로엘시 박사는 1992년 독일로 건너간 이 교수에게 처음 간이식 수술 가르쳤던 스승이었다. 불과 10년만에 사제(師弟)의 입장이 바뀐 것이다. 미국과 프랑스, 오스트리아, 일본, 터키 등 세계 유수의 간 이식센터에서도 의술 전수 요청이 잇따르고 있다.

이 교수의 마음은 ‘실패한 4%’ 때문에 늘 안타깝다. 수술을 시작하기 전 지혜와 힘을 달라고 간청하는 기도를 올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다른 병원에서 “도저히 가망이 없다”며 ‘사망선고’를 내린 말기 암 환자들이 찾아와도 차마 외면하지 못한다.

“우리마저 포기하면 그들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팀원들에게 우리 병원은 3차 진료기관이 아니라 4차 진료기관이라는 자부심으로 일하라고 격려합니다.”

그의 수술대에 오른 환자의 96%가 새 생명을 얻는다면 ‘이승규’라는 이름 석자 앞에 ‘21세기의 화타’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게 과장은 아닐 것이다. 나머지 4%는 신의 몫이 아닐까.


sjpark@munhwa.com



기사 게재 일자 2005-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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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주기자가 만난 21세기 개척자>
오늘의 그가 있기까지

박상주기자 sjpark@munhwa.com

이승규 교수는 어릴 적 크고 작은 병치레를 많이 했다. 다섯 살 때 일본 도쿄대에서 심장병 수술을 받기도 했다. 일본 의료계에서 실시한 심장병 수술의 첫 성공 케이스가 바로 그였다. 경기고 재학시절에는 장질부사에 걸려 6개월 동안 휴학을 해야 했다.

이 교수는 이처럼 자신이 자주 아팠기 때문에 의사의 길을 택한 듯하다고 스스로 짐작했다. 병원 문턱을 들락거리면서 의사들에 대한 친밀감 같은 게 생긴 듯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가 의사의 길을 가게 된 것은 “아들이 안정적인 전문인으로 편하게 살기를 원하는 어머니의 권유 때문”이라고 했다.

부모님 다음으로 이 교수의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인물은 민병철 전 서울아산병원장이었다.

이 교수는 서울대 의대 본과 1학년이던 1969년 당시 서울대 교수였던 민 원장을 처음 만났다. 이후 이 교수는 신영외과병원(1978~1983년), 고려대 의대 구로병원(1983~1989년), 서울아산병원(1989년~) 등의 원장을 맡았던 스승을 따라 항상 행동을 함께 했다.

“대장·항문 분야를 전공으로 생각하고 있던 제게 간 이식을 공부하라고 처음 권한 분이 선생님이었습니다. 1986년 고려대 구로병원에서 함께 근무하던 시절, 선생님께서 ‘미국으로 건너가 간 이식 기법을 배워봐라’고 하셨습니다. 편안한 돈벌이만 생각하고 있던 저에게 ‘인술’을 깨우쳐준 평생의 스승이지요.”

이 교수는 스승뿐 아니라 동기들도 유별나다. 성상철 서울대 병원장, 박제갑 국립암센터 원장, 이종철 삼성서울병원장, 이철 울산대 병원장, 박인숙 울산대 의대 학장 등이 모두 이 교수와 함께 공부한 서울의대 27회 동기들이다.

“하나같이 의사로서의 욕심이 많은 친구들입니다. 속된 말로 ‘지랄같다’는 말이 더 적절한 표현일 듯합니다.”

표현이 조금 지나쳤다고 생각했는지 이 교수가 빙그레 웃었다. 그 속엔 자신과 같은 길을 가는 스승과 친구들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담뿍 담겨 있었다.


▲1949년 서울 출생 ▲1967년 경기고 졸업 ▲1973년 서울의대 졸업 ▲1986년 서울대 의학박사 ▲1973년 서울대 부속병원 인턴 ▲1983~89년 고려대 의대 구로병원 전임강사, 조교수, 부교수 ▲1986년 7월~1987년 8월 미국 보스턴 레이 클리닉 및 뉴잉글랜드 디코네스 병원 연수 ▲1992년 3월~1992년 4월 독일 하노버 의과대학 간이식 연수 ▲1989년~현재 울산의대 서울아산병원 외과 부교수, 교수 ▲2002년~현재 울산의대 서울아산병원 장기이식센터 소장

기사 게재 일자 2005-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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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주기자가 만난 21세기 개척자>
외유내강형 카리스마
박상주기자 sjpark@munhwa.com
지킬 박사와 하이드. 영국 소설가 로버트 스티븐슨의 이 작품은 인간은 누구나 지킬 박사처럼 선한 측면과 하이드 같은 악한 측면을 함께 지녔음을 그리고 있다. 사람을 겉으로만 판단해선 안 된다는 얘기다.

이승규 박사는 일단 수술실에만 들어가면 ‘표변’한다는 게 병원관계자들의 말이다. 인터뷰 자리에 배석했던 병원 관계자의 말을 들어보자.

“언젠가 한번 수술실에 들어갔다가 교수님의 호통소리를 듣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평소 입에 담지 않던 험한 말로 레지던트 한명을 야단치더라고요.”

이 교수는 “내가 바로 ‘지킬 박사와 하이드’”라며 웃었다. 외모로만 본다면 그의 입에서 큰 소리가 나올 거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다. 아무리 뜯어봐도 남에게 싫은 소리 한마디 못할 것 같은 유순한 인상을 지녔기 때문이다.

“까딱 잘못했다가는 사람의 생명이 위태로워지는 상황입니다. 조그만 실수라도 용납할 수 없지요. 외과의사라면 초짜 시절 누구나 겪게 되는 험난한 과정입니다.”

마취팀, 수술실, 중환자실, 임상병리, 방사선과 등 간 이식과 연관된 40여명의 팀원들은 그의 말 한마디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겉 모습과는 달리 만만치 않은 카리스마를 지녔다는 얘기다.

“응급환자 수술 때문에 새벽 2~3시에 호출을 해도 군소리 없이 나옵니다. 묵묵히 따라주는 팀원들이 고맙지요.”

그렇지만 야단치는 만큼 다독거린다. 아버지 얼굴을 자주 보지 못하는 직원 가족들을 위해 연말이면 가족동반 위로 파티를 열어주기도 한는 게 그 한 사례다. 이 교수 자신도 부인 장유순(53)씨와 남매인 대윤(25), 지윤(23)을 보는 시간이 많지 않다. 주말마다 꼬박꼬박 함께 교회에 나가는 게 그나마 가족과 보내는 얼마 안되는 시간이다.



기사 게재 일자 2005-09-20
Posted by 동그라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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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규

전망 좋은 방 2009. 1. 14. 23:33
[만물상] 의사 이승규
김홍진 논설위원 mailer@chosun.com
1992년 8월 서울아산병원 3층 수술실에서 20시간에 걸친 수술을 마친 외과 이승규 교수가 한강을 바라보며 "해냈다"고 외쳤다. 41세 간경변 환자의 간을 들어내고 뇌사자 간으로 갈아 끼우는 국내 세 번째 간이식 수술에 성공한 것이었다. 수술 전 1년 동안 주말마다 개(犬)의 간으로 연습을 했다. 독일에 가서 간암 세계 최고 권위자 브로엘시 박사로부터 수술기법도 배워왔다.

▶그는 9년 만에 스승을 뛰어넘었다. 2001년 브로엘시 박사가 '한 수 가르쳐달라'고 요청해왔다. 그가 세계 최초로 살아있는 두 사람의 간 일부를 떼어 한 환자에게 이식하는 2 대 1 수술에 성공한 것이다. 이달 초 서울아산병원에서 열린 세계간암학회엔 간암 권위자 300여명이 몰려왔다. 예년 참석자의 두 배였다. 간암수술 대가인 일본인 학회장은 "세계 최고라는 미국 엠디앤더슨 암센터보다 이 교수팀이 뛰어나다"고 했다.

▶이 교수는 다섯 살 때 결핵성 심낭염에 걸려 일본까지 건너가 수술을 받아 구사일생했다. 그가 이 병의 첫 수술 성공 사례였다. 그래서인지 그는 "잠재의식에서부터 흰색 가운이 좋았다"고 했다. 그를 살린 것이 가슴수술이었기에 흉부외과가 끌렸지만 더 많은 스태프들이 회진(回診)에 따라다니는 게 멋있어서 일반외과를 택했다. 남들이 꺼리는 힘든 일을 하겠다는 생각, 그리고 스승인 민병철 전 서울아산병원장 권유로 간이식 수술을 전공하게 됐다.

▶이 교수의 허벅지 굵기는 웬만한 처녀 허리만하다. 10시간 넘게 허리를 구부려 수술하려면 하체가 중요해 수술실 옆방에 러닝머신을 두고 틈만 나면 뛴다. 36시간 수술기록도 있다. 환자들에게 의사의 체력은 '생명줄'이다. 수술실에서 김밥·라면으로 때우고 새우잠 자기 일쑤다. 몇 년 전 어머니 장례 날 밤에도 긴급호출을 받고 수술실로 달려갔다.

▶이 교수팀은 올해 322건의 간이식 수술을 해 작년 320건에 이어 한 해 세계 최다 간이식 기록을 경신했다. 일요일 빼고 1년 내내 수술한 셈이다. 미국 ABC방송은 "드림팀"이라고 찬탄했다. 수술 성공률도 95%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5%의 실패 중엔 다른 병원에서 "가망 없다"고 보낸 암환자들도 있지만 지식 부족이나 수술 잘못도 있었다고 그는 인정한다. "성공률 100%는 신이나 할 수 있는 일이지요." 그래도 그의 의사철학은 "실패는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Posted by 동그라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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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문갑식의 하드보일드] "70까지 칼잡이로 살겁니다"
'肝이식 최고 권위' 서울아산병원 이승규 교수
1953년 겨울 부산역 앞에서 큰불이 났다. 그 불로 일대 상가(商街) 수십 채가 잿더미가 됐다. 네 살 난 소년 이승규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점포도 그 안에 있었다. 소년의 가족은 졸지에 정부가 마련해준 텐트촌(村)으로 나앉게 됐다. 화(禍)는 홀로 오지 않는다는 말은 이럴 때 꼭 들어맞는다.

이듬해 소년의 얼굴이 갑자기 붓기 시작했다. 복수(腹水)가 차올라 배가 맹꽁이처럼 부풀어올랐다. 심장을 싸고 있는 심낭(心囊)이 쭈그러들면서 심장 박동을 방해하는'협착성 심낭염'이라는 질병이었다. 의사는 "아이 목숨을 살리려면 미국이나 일본의 큰 병원으로 가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 이승규 교수가 간 이식 수술을 직접 집도하고 있다. 수술을 하기 앞서 이 교수는 수술복을 입고 눈에 3.5배 확대경 을 쓴다. 마스크는 내쉬는 숨에 안경알이 뿌옇게 변하는 것을 막기 위해 윗부분을 조인다. / 허영한 기자 younghan@chosun.com
소년의 생명이 꺼져가고 있을 때 그의 삼촌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아버지의 도움으로 일본에서 파친코업을 하던 삼촌이 "일본 도쿄대(東京大)병원으로 오라"며 은혜를 갚은 것이다. 1955년 소년은 이름 모르는 한 일본인 아저씨와 함께 1주일 간격으로 수술대에 올랐다.

"저보다 1주일 먼저 수술한 그 분은 결국 사망했어요. 무등도 태워주고 했었는데…. 제가 일본에서 협착성 심낭염 수술에 성공한 첫 환자였다는 걸 나중에 알았지요. 중환자실에서 한 달, 입원실에서 6개월, 다시 5개월 동안을 통원하다 1년 만에 귀국했습니다."

그 소년이 지금 세계 최고의 간 이식 수술 전문가가 된 이승규(李承奎·60) 서울아산병원 외과 교수다. 1992년 처음 간 이식 수술을 한 그는 99년 연간 간 이식 수술 100건을 돌파했고 2004년 200건을 넘겼다. 작년에 그는 326차례나 간 이식 수술을 해 자기 기록(320건·2007년)을 스스로 깨버렸다.

세계 최고가 된 지금도 그는 집보다 병원에 더 머물며 세계의 간 이식 수술사(史)를 고쳐 쓰고 있다. 지난 크리스마스도, 12월31일 밤에도 그는 수술실에 있었다. 그런 그를 보기 위해 세계의 내로라하는 외과의들이 1년 내내 서울아산병원으로 몰려들고 있다.

―지금까지 몇 회나 간 이식 수술을 한 겁니까.

"작년 말까지 2175회 했습니다. 처음에는 많지 않았어요. 92년 3건, 93년 4건, 95년 5건 정도였어요. 99년 100회를 넘었지요. 그 해 한 번도 앓지 않던 몸살이 나 포도당 주사를 처음 맞아봤습니다. 연간 200회를 넘긴 건 2004년입니다. 300회는 2007년에 넘겼고요. 지금보다는 처음에 많이 힘들었지요. 어디 앉기만 하면 쓰러져 잠들기 일쑤였어요."

―1992년만 해도 간 이식 수술이 잘 알려지지 않았지요?

"1986년 초 미국 하버드대로 1년간 연수를 갔습니다. 스승인 민병철(閔丙哲·전 서울아산병원장) 선생님이 소개해준 의사에게 갔는데 간·담도 암 수술 장면을 보고 실망했어요. 생각했던 것보다 수준이 낮았거든요. '1년을 어떻게 보내나' 하고 고민하다 간·담도보다 혈관수술을 주로 구경했는데 그 미국 교수가 눈치를 챘는지 다른 병원으로 보내줬어요. 기분이 나빴을 법도 한데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습니다. 보스턴에 하버드대 부속 병원이 여러 곳 있는데 그 중 한 곳에서 간 이식 수술을 봤지요."

―86년에 처음 간 이식 수술을 보고 5년 뒤에야 본격적으로 간 이식 수술을 공부한 데는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

"87년 11월에 귀국해 89년 2월까지 민 선생님을 따라 고대 구로병원에서 근무했어요. 89년 3월 민 선생님이 아산병원으로 옮길 때 따라왔지요. 그 과정에서 전공이 몇 번 바뀌었지요. 처음에는 대장항문 쪽을 주로 하다 90년 여름에 미국 신시내티로 1주일 동안 출장 가 복강경 수술 장면을 처음 보고 돌아와서 민 선생님께 '홈런감입니다'라고 보고했어요. 그 후 복강경 수술을 많이 했는데 민 선생님이 90년 말에 간 이식 수술을 공부해 보라고 권유하더군요."

―세계 최고의 간 이식 수술 전문가가 된 이면에 개들의 희생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1991년부터 1년 동안 매주 토요일 오후마다 동물실험실에서 실습을 했어요. 1년에 개 100마리가량을 썼지요. 당시 개값이 꽤 비싸서 한 번 실습할 때마다 200만원가량이 들었습니다."

―왜 개를 씁니까.

"개가 터프해 보이지만 인간보다 훨씬 약합니다. 혈압이 조금만 바뀌어도 금세 심장마비가 오지요. 개보다 사람이 훨씬 강해요. 그래서 개를 살리면 사람은 100% 살릴 수 있다는 말이 있지요. 돼지도 괜찮지만 사육하기가 힘들어요. 두 번쯤 하다 그만뒀습니다."

―개들의 생존율은 어느 정도였나요.

"처음 두세 달은 100% 다 죽었습니다. 그 이후 생존율이 70%로 올라갔습니다."

―간 이식 수술은 시간이 상당히 걸린다지요.

"건강한 사람에게서 간을 떼 환자에게 이식하는 거니까요. 신장은 2시간 반에서 3시간, 심장은 길어야 5시간 걸리지요. 간 이식 수술은 평균 12시간 정도 걸립니다. 1대1 간 이식은 아침 8시 반에 시작해 오후 7~8시에 끝나고 2대1 간 이식은 오전 8시 반에 시작해 다음날 새벽 5시까지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랜 시간을 버티려면 집중력이 대단해야겠군요.

"클래식 음악을 듣는 경우도 있고 팝송을 틀어놓기도 하지요. 수술의 하이라이트는 전체 시간의 4분의 1에서 3분의 1 정도입니다. 수술도 중요하지만 수술 전에 CT나 MRI를 보고 어떻게 수술 플랜을 짜느냐도 중요합니다. 수술 전에 회의를 자주 합니다."

―숙달된 전문가라도 수술 도중 깜빡 할 때가 있지 않나요.

"저는 그런 정도는 아니지만, 수술할 때 팀원들에게 자주 물어봐야지요. '내가 잘못한 거 없느냐' '안 한 거 없느냐' 하는 식으로 체크합니다. 수술실 곳곳에 표어도 붙여놓습니다. 핵심적인 것들이지요. 아무래도 생명을 다루는 일이니까요."

―하루 종일 서있는 게 힘들지 않습니까.

"피가 아래로 몰려서 다리에 무리가 많이 갑니다. 정체성 피부염 증상도 있어요. 식당에서도 좌식(坐式) 식탁을 이용하지 않습니다. 오랜 시간을 버티려면 평소 운동을 많이 해야 해요. 힘 빠지고 체력이 떨어지면 머릿속에 든 게 아무리 많아도 소용 없어요. 1주일에 4회 정도 조깅도 하고 근력운동도 하지요. 한 번에 100회 정도 팔굽혀펴기도 하고요."

―먹는 것도 잘 먹어야겠지요.

"1주일에 4회 정도 삼겹살이나 닭고기를 먹지요. 개고기도 먹었는데, 어느 날 개고기를 먹고 들어갔는데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가 제게서 무슨 냄새를 맡았는지 기겁을 하고 도망가는 모습을 보고 끊었습니다."

―17년째 거의 매일 간을 봤으니 간 천엽이나 간전은 보기도 싫겠네요.

"다 잘 먹는데요?"

미국 ABC방송이 지난달 23일 이승규 교수의 수술 팀에 대한 특집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그들은 그 프로그램에서 95%의 수술성공률을 자랑하는 아산병원 간 이식 수술팀을 '한국의 드림팀'이라 부르며 "그들은 가족처럼 끈끈하고 헌신적인 팀워크를 가졌다"고 보도했다.

이승규 교수의 간 이식 수술팀은 이 교수와 겸임교수 4명, 병원 임상교수 4명, 전공의를 마치고 교수가 되는 중간 단계인 '펠로' 6명과 간호사들로 구성돼 있다. 그 중 황신 교수는 84년부터, 안철수 교수는 86년부터 그와 호흡을 맞추고 있다.
그런가 하면 그가 배출한 제자들이 울산, 대구, 부산, 인천, 광주, 익산에서 간 이식 수술을 하고 있다. 한국의 간 이식 수술은 '이승규 사단(師團)'이 다 한다는 말은 이래서 생긴 것이다. 이 교수는 제자들이 정착할 때까지 필요하다는 말만 들으면 총알택시를 타고 가 수술을 해주기도 한다.

―의사 사회는 위계질서가 남다른 것 같습니다.

"그런 편이지요. 저도 민병철 선생님이 설립한 종로구 관철동 신영(新英)병원에 따라 갔다가 고대 구로병원, 서울아산병원까지 왔으니까요."

―TV 드라마나 소설에서 보면 기합도 단단히 주는 것처럼 묘사돼있는데 사실입니까.

"서울대 의대 출신들은 욕을 하고 고함은 지르지만 때리지는 않아요. 제가 레지던트 때 세브란스 병원에 교환학생으로 간 적이 있는데 세브란스는 '조인트'를 까더군요. 처음 보고 놀란 기억이 납니다."

―왜 욕을 하고 고함을 지릅니까.

"욕을 하고 고함을 치면 잠시 긴장하잖아요. 수술할 때 긴장을 유지하는 데는 최고지요. 한번 거기 맛을 들이면 끊을 수가 없습니다."

―민병철 선생께 배울 때도 욕을 많이 먹었습니까.

"많이 먹었지요. 주로 '너처럼 수술 못하는 놈은 처음 봤다' '왜 그렇게 머리가 나쁘냐' 이런 식이지요. 그걸 듣고 우는 동료들도 있지만 저는 둔해서 그런지 운 적은 없어요. 지내놓고 보니 못된 시어머니 밑에 있던 며느리가 나중에 더 못된 시어머니가 된다는 말 그대로가 됐습니다."

―장시간 수술을 하면 집에 못 들어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겠지요. 젊은 의사부부들 간에 가정 트러블은 없나요.

"제가 1년에 한 번은 꼭 아이들을 포함해 전 가족을 호텔로 불러요. 넓은 방을 잡아놓고 뷔페 식으로 식사한 뒤 장기자랑하고 선물을 나눠주는 모임인데요, 몇 년 전에 부인들에게 '이야기할 거 있으면 해보라'고 했다가 곤욕을 치른 적이 있어요."

―뭐라고 하던가요.

"남편들이 병원에서 잠을 자기 일쑤고 2, 3일에 한 번 집에 들어갈까 말까 하니까 '제 남편을 돌려주세요' '너무해요'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거예요. 누군가 먼저 그런 말을 하니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져 나와 무척 당황스러웠어요. 그 다음부터는 부인들에게 발언 기회를 안 주지요."

―이 교수의 부인(장유순·58)은 투정을 부린 적이 없나요.

"집에 들어가자마자 쓰러져 자는데 옆에서 울고 있는 경우가 많았지요. 그럴 때는 다음 번에 빨리 들어오겠다고 할 수밖에 없잖아요. 지금은 오히려 젊은 의사들 부인들을 잘 설득하고 다독거리는 역할을 집사람이 합니다. 여러 조언도 해주고요."

―천생연분인 모양입니다.

"아산병원 정신과 이철 교수 부인과 제 집사람이 친구예요. 이 교수는 저와 고교, 대학 동기인데 어느 날 작정하고 절 불러내 미팅을 시킨 겁니다. 만난 지 2주 만에 프러포즈했지요. 제가 지금까지 이렇게 대학에 있게 된 게 다 아내 덕분입니다."

―그건 무슨 이야기입니까.

"민 선생님 따라서 고대로 가면서 서울대 교수가 되겠다는 꿈이 사라졌지요. 그때 개업을 할까 말까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돈 많이 버는 걸 좋아할 텐데 집사람은 '당신은 병원 하면 망할 스타일이니 학교에 남는 게 좋겠다'고 했어요. 지금은 집사람이 '그때 내 말 잘 듣지 않았느냐'고 큰소리를 쳐요. 그런 조언을 해준 게 고맙지요."

―이 교수의 수술팀이 오랜 세월 고되게 일하면서도 조직력을 유지하는 걸 보면 외과의들에게는 특유의 자부심이 있는 것 같습니다.

"외과의를 부를 때 두 가지 별명이 있지요. 하나가 '이발사', 하나가 '칼잡이'라는 겁니다. 이발사는 옛날에는 외과수술을 할 때 이발사가 했기 때문에 생긴 별명인데 들으면 기분 나쁘고요, 칼잡이라는 별명은 명예스러운 겁니다. 최고의 전문가라는 뜻이지요."

―요즘 젊은 의대생들은 힘들이지 않고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과(科)를 택하는 게 유행이 되지 않았습니까.

"외과는 드라마틱하지요. 혼수상태에 빠져 호흡도 곤란하고 소변도 못 보고 배에 복수가 차, 폐까지 잠기던 사람이 의식을 되찾고 살아나는 겁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 중에는 40세까지 열심히 돈 벌어놓고 나머지는 취미생활을 하겠다는 사람이 많은데 외과의는 본인이 하고 싶은 것에 흥미와 자부심을 느끼지 못하면 할 수 없는 직업입니다. 저희는 의사뿐 아니라 간호사들도 자부심이 대단해요. 그래서인지 성격도, 인상도 전부 비슷비슷합니다."

―아직도 개업의 꿈이 남아있지 않나요?

"개업했으면 망했을 겁니다."

서울대 의대 출신들에게 서울대병원은 고향 같은 존재라고 한다. 이 교수도 그 꿈이 무산된 것을 아쉬워하는 듯했다. 스승 민병철 선생님이 "언젠가 서울대로 보내주겠다"고 한 약속을 어긴 것이나 서울대 소아과로 갈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에 대한 회한 같은 게 남아있는 듯했다. 공교롭게도 서울대의 대표적인 의사 2명이 그에게 암 수술을 받으면서 서울대 의대와의 관계가 묘하게 됐다. 서울대 의대의 특강(特講)에 아직까지 그가 초청받지 못한 것을 두고 의료계에서는 "서울대 의대가 그때의 감정을 아직 풀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것이다.

―서울대병원장을 지낸 한만청 교수가 서울대가 아닌 이 교수에게 간암 수술을 맡겼죠?

"한 선생님이 간암 3기 후반쯤 됐어요.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어느 날 '면회 좀 오라'고 해요. 갔더니 '네게 수술을 맡기겠다'는 겁니다. 11년 전의 일입니다."

―그 분은 완치됐습니까.

"지금도 잘 계시죠."

―한만청 교수 한 분 때문에 서울대에서 펄펄 뛰는 겁니까.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 주치의를 맡았던 고창순 선생님이 계셨는데 그 분은 더 심각했어요. 간암 4기였으니까요. 왼쪽 부신(副腎)까지 암이 전이가 됐는데 13년 전 추석 때 '급하니 와달라'는 거예요. 의사들이 수술할 엄두를 못 내고 있었는데 제가 수술을 했지요."

―그런 환자가 오면 겁이 나지 않나요.

"민병철 선생과 고창순 선생님이 사돈 관계입니다. 민 선생은 얼마나 부담이 됐겠어요. 제게 '미국이나 일본으로 가시라고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어서 제가 '자신 있습니다'라고 했어요. 그 분도 완치됐지요."
▲ 이승규 교수는“나이가 오십이 넘으면 수술을 하지 않는 우리나라 외과의 나쁜 전통이 있다”며“나는 은퇴 직전까지 수술 을 하겠다”고 말했다. / 허영한 기자 younghan@chosun.com
―이 교수도 서울대 의대 출신인데 서울대병원에서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게 섭섭하지는 않습니까.

"저는 환자에게 의사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봅니다. 어떤 환자가 저를 믿지 못하면 미국이나 일본의 다른 병원으로 가라고 권유합니다. 믿지 못하는 데 어떻게 생명을 맡기겠습니까."

―항상 그렇게 환자들에게 단호합니까.

"환자는 의사의 말 한마디에 좌우됩니다. 확신을 가지고 '당신의 상태로 봐서 이 수술이 제일 적합하다'고 권유해야지요. 이런저런 수술법이 있는데 어떤 걸 택하겠느냐는 의사도 있는데 그건 의사 자격이 없는 겁니다. 생명을 살리는 것과 물건 파는 건 다르잖아요."

―간 이식 수술의 대가가 된 것도 서울대로 못 간 것과 인연이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사실 제가 간 이식 수술을 본격적으로 배운 게 서울대 의대로 가겠다는 꿈이 좌절되면서부터입니다. 고대 의대에 있을 때 '무엇을 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한 적이 있어요. 의사로서 평생을 버티려면 남들이 하지 못하는 걸 해야 하잖아요. 민 선생님의 권유도 있었지만 간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제가 1974년부터 78년까지 서울대에서 레지던트 할 때 간암 수술을 딱 한 번밖에 못 봤거든요."

―아직도 서울대 의대로 못 간 게 후회가 됩니까.

"제가 서울대 의대로 갔으면 안주하고 말았을 겁니다. 고대로 가면서 도전하려는 열정 같은 게 생겼지요."

―칼잡이라는 별명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데 혹시 집에서 고기 같은 것 자를 때 솜씨를 발휘합니까.

"어느 일식집에 갔는데 저를 초대한 분이 주방장에게 '이 분이 한국 최고의 칼잡이'라고 하니, 그 주방장이 생선 써는 시범을 보이더군요. 의사는 칼을 그렇게 쓰는 게 아니라 정교하게 수술하는 겁니다. 메스는 개복할 때 한 번 쓰는 정도입니다. 고기 써는 것과는 다르지요."

―간 이식 수술은 수술도 중요하지만 기증자를 찾는 일도 그에 못지 않다고 들었습니다만.

"기증받고 환자가 잘 퇴원하면 가족 간의 유대감이 말할 수 없이 끈끈해집니다. 흉터는 남지만 기증자들이 그렇게 만족해할 수가 없어요. 내가 우리 부모를 살렸다, 내 아내를 살렸다, 내 자식을 살렸다는 만족감이지요."

―황당한 사례도 있겠지요.

"남편이 간 이식 수술을 받는데 그 간을 아내의 옛 남자친구가 기증한 적이 있었어요. 간을 기증하려면 가족의 동의가 있어야 되니 두 부부가 이상하게 만난 셈이죠. 네 사람 얼굴이 전부 착하게 생겼더군요. 선(善)하다는 게 바로 저런 사람들을 가리키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들과 딸 중에 누가 더 간을 잘 기증합니까.

"아들은 기증하려 해도 아내가 반대하면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반대로 딸은 남편이 반대해도 기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수술에 기증자 찾기에, 스트레스가 대단할 텐데 어떻게 풉니까.

"담배는 안 피우고 술은 젊었을 때부터 어울려보려고 소주도 반 병씩 마셔봤지만 몸에 안 맞더군요. 제가 성격이 순해서 운동하며 땀 흘리고 한숨 자고 나면 그냥 잘 넘어가져요."

인터뷰 도중 이승규 교수는 다시 수술실로 들어갔다. 기자와 사진기자도 옷을 모두 갈아입고 수술실로 따라 들어갔다. 그곳에는 배 윗부분 근육을 모두 위로 까뒤집은 환자가 마취상태로 간 이식 수술을 받고 있었다. 흥건히 배어 나온 피를 닦아낸 거즈가 겹겹이 쌓여 있었다. 이 교수는 손을 씻고 수술가운으로 갈아입은 뒤 3.5배 확대경을 쓰고 수술대 위에 섰다. 그 모습이 사이보그 전사(戰士)같아 보였지만 그는 자기 자리로 다시 돌아온 듯 편안한 표정으로 수술을 진행했다. 1시간 동안 본 이 교수팀은 정교한 톱니바퀴가 돌아가듯 척척 호흡을 맞추고 있었다.

―언제까지 수술을 할 겁니까.

"우리나라 외과에는 나쁜 전통이 있어요. 나이가 오십만 넘으면 수술을 하지 않는 거지요. 제가 미국에서 나이 칠십이 넘어 머리가 허연 영감이 수술하는 장면을 보고 감명을 받았어요. 수술은 경험이 중요합니다. 일본에서도 의사들은 은퇴하기 직전까지 메스를 놓지 않지요. 저는 70세까지는 이 일을 할 겁니다."

―외과 수술 예찬론자 같은 말씀입니다.

"저희가 하는 수술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답답할 정도로 진도가 느려 보이지만 전문가가 보기에는 정말 섬세하고 멋있는 수술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 겁니다. 그만큼 굉장한 자부심을 의사도 간호사들도 느끼지요."

―자제(1남1녀)들에게 이 교수의 길을 잇게 할 겁니까.

"아들은 회사에 다니고요, 딸이 이화여대 의대에 다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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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나테 홍

전망 좋은 방 2008. 10. 5. 23:31
독일인 레나테 홍 할머니가
북조선에 계신 지아비를 찾습니다
1960년 북한 유학생 홍옥근씨와 결혼 후 45년 동안 생이별
    이동기(jenaer) 기자   
 
 
저는 독일의 분단과 통일 문제를 공부하는 역사가입니다. 대략 4년전 베를린의 연방정부문서보관소에서 우연히 동독시절 조선(북한)유학생과 동독 여학생들 사이의 사랑과 이에 대한 양국의 통제에 대한 여러 자료들을 보았습니다. 관련된 10여 명의 동독여성들 중, 남편과 함께 조선(북한)으로 갔다가 혼자 다시 돌아온 경우,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기 전에 함께 서독으로 넘어간 경우, 하루아침에 생이별을 한 경우 등이 있습니다. 아래에 소개하는 레나테 홍 할머니는 특히 지금까지 남편을 기억하며 기다리는 극히 드문 경우입니다.

홍 할머니는 2년전 독일 친구의 소개로 예나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할머니의 생애를 20세기 후반 냉전과 국제 정치 갈등과 관련된 현대사적 맥락 속에서 재구성하여 이 비극적 삶에 대한 이해를 공유하도록 하는 것이야 역사가로서 제가 추후 본격적으로 매달릴 일이지만, 일단 개략적인 내용을 편지 형식을 빌어 소개합니다. 사람찾는 수소문을 기간에 몇 차례 해보았지만 여의치 않았습니다. 레나테 홍 할머니 뿐 아니라 <오마이뉴스>를 통해 많은 이들이 함께 오작교를 만들었으면 합니다. <기자주>

 
 
▲ 1961년 3월 첫째 아들 홍현철과 찍은 가족 사진. 홍옥근씨가 북한으로 돌아가기 바로 한달 전 찍은 사진이다. 
 
ⓒ 이동기
 

홍옥근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여긴 독일입니다. 독일 사람으로 홍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상상해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곳 예나(Jena) 시에는 홍씨 성을 가진 한 독일 가족이 있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나 홍씨'의 시조인 조선 땅 함흥에 살고 있을 1934년생 홍옥근, 당신을 찾고 있습니다. 지난 주말은 독일의 구동독지역 이 곳 예나 시에 사는 홍 할머니의 생일이었습니다.

당신과 결혼하여 두 아들을 홀로 키운 독일인 부인 레나테 홍(Renate Hong)은 며칠 전(7월 29일) 69세의 생일을 맞아 당신의 아들, 손자들과 함께 이 곳 예나에서 식사 모임을 가졌습니다. 남편 없이 맞는 45번째의 쓸쓸한 생일상이었습니다. 남편인 당신은 1961년 4월, 한살배기 큰 아들과 이제 갓 모태에서 자라고 있던 둘째를 두고,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과 6년을 함께 보낸 사랑하는 부인 레나테를 두고 당신의 조국 '조선'으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그 뒤 지금까지 레나테는 여전히 당신을 기다립니다.

수십 년의 기다림과 외로움, 무력감의 세월은, 행복했고 아름다웠던 순간들을 기억하며 달래기에는 참으로 길고 속절없을 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홍 할머니는 여전히 단정하고 화사하며 친절하고 맑은 마음을 갖고 계십니다. 할머니가 자주 말하는 ‘실낱같은 희망’이 할머니를 지켜주는 버팀목입니다. 남편을 다시 만나는 기적 같은 일에 대한 희망 말입니다. 할아버지, 살아계심을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그 어떤 소설과 영화보다 더 극적인 이 할머니와의 사랑과 이별의 이야기에 다시 등장해 주세요!

 
 
▲ 1956년경 예나 대학 기숙사에서 촬영한 사진이다.(사진 왼쪽) 당시 동독에는 350명의 북한 유학생이있었다. 홍옥근씨는 예나 대학에서 화학을 공부했다. 오른 쪽은 동독에 도착해 처음 촬영한 증명사진. 
 
ⓒ 이동기
 
홍옥근과 레나테의 만남, 사랑 그리고 결혼

조선 청년 홍옥근과 게르만 아가씨 레나테 클라이넬레(Renate Kleinele)는 1955년 가을 신학기 개강과 동시에 예나 대학에서 처음으로 만난다. 이제 막 20살을 넘긴 청년은 평안북도 운전군 동창리 출신으로 1954년 조선(북한) 정부에 의해 제3차 동독 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그는 100여 명의 동료들과 함께 대륙을 가로지는 십수 일동안의 기차여행을 거쳐 1954년 9월 동독의 라이프치히 시에 도착한다.

이미 동독은 한국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사회주의 국제주의 연대'를 표방하며 1952~1953년 겨울 1차로 103명, 1953년 9월 130명 등 조선(북한)학생들을 받아들였다. 한국전쟁과 그 직후에 온 이들 조선(북한) 유학생들과 전쟁고아들은 또 다른 동서 냉전의 대결장이자 민족 분단국인 동독에서 '반미투쟁의 모범'으로 대대적으로 환영받았다.

홍옥근은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독일어를 배운 뒤 1955년 9월 예나로 옮긴다. 이 곳에서 그는 1960년 3월까지 화학을 공부해 석사 과정 학업을 마친다. 구 동독 외무부 자료에 의하면 1957년 말 현재 동독 전역에 350명의 조선(북한) 유학생이 있었다(동독에 수용된 북한 고아 숫자는 대략 600명 정도). 상당수의 학생들이 드레스덴 공대에서 공부를 한 반면, 그 중 약 10명 정도가 예나에서 주로 화학과 물리학을 공부했다.

1955년 9월 초 학기가 시작되었을 때 홍옥근은 이미 첫 강의에서 같은 화학과의 동료 새내기 레나테를 만난다. 레나테와 거의 매일 같은 수업을 받던 홍옥근은 곧 레나테에게 자신의 호감과 관심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솔직하게 밝힌다. 미남 청년 홍옥근은 드디어 9월 중순의 어느 날 신입생 환영 춤 파티에서 특유의 적극성으로 수줍어하고 소극적이었던 레나테의 마음을 갖는데 성공한다.

물론 레나테에게 이미 그는 다른 무엇보다 "똑똑하고 활달하고 재미있고 멋있는 남자"였다. 홍옥근은 성실하여 학업성적도 단연 우수했고, 1960년 졸업 시에는 최고 학점을 받는다. 독일어도 완벽하게 구사했고, 친구들 사이에서도 단연 신망이 높았다. 레나테와 홍옥근이 같이 만드는 시간은 아름다웠다.

 
 
▲ 1956년경 홍옥근씨와 레나테 홍의 연애시절. 당시 친구가 촬영한 것을 최근에야 받았다. 
 
ⓒ 이동기
하지만 모든 것이 항상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외국인에 대한 적대행위와 인종주의 때문이었다. 1950년대 동독의 작은 대학도시에서 극히 보기 드문 커플(아시아 남자와 독일 여자)이었던 그들은 거리나 공공장소에서 심심치 않게 외국인 적대행위를 겪게 된다. 레나테의 부모들도 그들의 연애와 결혼을 결코 환영하지 않았다. 다만 홍옥근의 사교성과 됨됨이가 어느 정도 문제를 중화시킨 것으로 보인다.

1960년 4월 20일 둘은 결혼하고, 그 해 10월 첫째 아들이 태어난다. 아비 홍옥근은 아이의 이름을 홍현철(독일 이름 페터 홍, Peter Hyon Zol Hong)이라고 짓는다. 일찍이 본 적 없던 동아시아인과 유럽인 사이의 혼혈아는 작은 도시에서 그 자체로 센세이션이었고, 주변 친구들의 큰 사랑을 받는다. 물론 두 부부에게는 거리나 공공장소에서 인종주의적 편견을 견뎌야하는 힘든 과제가 여전히 놓여 있었다. 그래도 아이는 너무 예뻤고 둘은 행복했다.

그런데 또 다른 파고가 이 가정에 닥쳐오고 있었다. 1960~1961년 극으로 치닫는 동서냉전과 국제정치적 갈등, 그리고 독일 분단의 파고는 이 조(한)-독 가정에 그대로 밀어 닥친다.

1961년 4월 15일 그리고 그 후

1961년 4월 15일이다. 그 날, 홍옥근은 졸업 후 실습생활을 하고 있던 비텐베르크시에서 급히 예나로 내려온다. 그 다음날로 곧장 조선(북한)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1960년을 정후하여 냉전이 위기로 치닫고 독일 분단이 고착화 될 조짐을 보이자 당시 많은 수의 동독 주민들이 서독으로 빠져나간다. 이에 대응해 동독 정부는 소련의 재가를 얻어 베를린 장벽을 세운다. 이런 간단치 않은 상황에서 조선(북한) 정부도 일시적으로 동독 유학생들을 전원 소환한다. 홍옥근은 레나테와 아이를 데리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레나테는 갈 수 없었다. 한 살짜리 첫아들에 이어 다시 두 번째 아이를 임신한 상태의 레나테는 당시 몸이 약해 도저히 최소 2주일이나 걸리는 그 먼 기차 여행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아울러 남편이 당연히 다시 동독으로 돌아오거나 자신이 나중에 아이들을 데리고 북한으로 갈 수 있음을 의심할 이유가 없었다. 그 곳은 '사회주의 형제국'이니까! 어쨌든 그렇게 밤을 밝히다 홍옥근은 레나테와 아이들을 두고 다음 날 다른 유학생들과 함께 동독을 떠난다.

조선(북한)으로 돌아온 홍옥근은 함흥에서 일자리를 얻는다. 당시 그의 주소는 '함흥시 본궁구역 이동 2.8 비날론 합성직장 서구 합숙'이었다. 함흥의 홍옥근과 예나의 레나테 부부는 1961년 4월부터 1963년 2월까지 편지를 통해 거듭 사랑을 확인하고 가정의 미래에 대한 해결책을 강구한다.

그러나 홍옥근은 다시 동독으로 오지 못하고 그 후 몇 년간 레나테가 조선(북한)으로 입국하려는 시도는 여러 가지 복잡한 이유로 모두 좌절된다. 1963년 2월 미묘한 암시가 깔린 편지를 마지막으로 함흥에서는 더 이상 편지가 오지 않았다. 레나테는 거듭 편지를 보내보지만 불어로 '수신자 불명'이란 딱지를 달고 되돌아올 뿐이었다.

그럼에도 삶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레나테는 남자 아이 둘을 홀로 키우며 고등학교 화학선생을 거쳐 예나의 예나 팜(Jenaer Pharm)이라는 제약회사에서 1993년까지 직장생활을 이어간다. 경제적으로 레나테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아울러 동독은 탁아시설이 훌륭했고 직업여성들에게 큰 불편함이 없었다. 그럼에도 레나테는 남편 없이 남편의 성을(홍씨 부인 Frau Hong이라 불림) 갖고 두 혼혈아들을 기르며 동독 사회의 인종주의적인 편견의 벽에 심심찮게 부딪혀야 했다. 레나테는 재혼을 하지 않았다. "두 아들에게 또 다른 아버지를 갖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세월은 흘렀다. 아이들은 자라 저마다 가정을 일구었다. 특히 둘째 아들은 부모와 마찬가지로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인근도시 바이마르에서 살고 있다. 손자들의 얼굴에서 홍옥근의 흔적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들은 모두 '예나 홍씨'가족이니까.

20평 남짓한 아파트에 고양이와 사는 홍 할머니의 주요 일과 중 하나는 저녁 뉴스를 보는 것이다. 할머니는 방송과 신문에서 한국(북한)과 관련된 이야기라면 어떤 것이든 빠트리지 않고 챙겨보고 있다. 그리고 한국 사람들과 만나는 일은 할머니의 일과 중 가장 가슴 설레는 일이다. 그렇게 홍 할머니는 한국(북한)과 얽힌 자신의 삶을 홀로 이어가고 있다. 홍옥근을 기다리면서!

 
 
▲ 2005년 겨울 기자가 촬영한 레나테 홍. 남편과 헤어진지 45년, 하지만 한시도 그를 잊은 적이 없다. 
 
ⓒ 이동기
 
이제 평양으로 선생님을 만나러 가겠습니다

함흥의 홍옥근 선생님! 당신의 부인 홍 할머니는 이제 그냥 기다리고만 있지 않기로 했습니다. 지난 주 생일모임에서 할머니는 당신을 만나러 조선(북한)으로 여행을 떠날 생각임을 밝혔습니다. 나이와 건강을 고려하면 이제 더 이상 늦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준비가 되는대로 할머니는 "꼭 한번 가보고 싶은 땅" 그 곳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얼마 전부터 할머니는 제게 거듭 확인 차 물었습니다.

"그가 설사 거기서 재혼을 했다고 하더라도 분명 이 곳에 있는 가족들을 보고 싶어 하겠지요?"

홍 선생님이 직접 답하셔야 합니다. 이미 비슷한 사연의 또 다른 이야기도 소개된 바 있고, 분단이 빚은 슬픈 사연들이 국내에서만도 한 둘이 아닙니다. 홍 할머니 이야기를 접한 많은 이들이 안타까움에 가슴을 내리지만 누구도 할머니를 도울 방법을 선뜻 내지 못합니다. 홍 선생님이 직접 나서야 합니다. 올 가을이나 내년 봄 할머니가 그 곳으로 먼 걸음을 나서면 할아버지가 한 발짝이라도 더 나와 맞으셔야할 것입니다. 레나테가 45년 세월을 가로질러 당신을 만나러 그 곳으로 간단 말입니다. 그 때까지 건강하세요, 제발!

평양의 박시옥 선생님! 선생님은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얼마 전에 예나 대학에 물리학 관련 학술 교류 차 왔다가 홍 할머니를 직접 만나고 돌아가셨습니다. 선생님은 예나 유학시절 두 분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고 들었습니다. 할머니는 조선(북한)에 가면 선생님이 도와주실 것이라 믿고 계십니다.

아울러 1950년 대 후반 예나에서 같이 공부하신 리(이)호열, 김동성 선생님! 특히 리호열 선생님도 89년 예나에서 홍 할머니가 어떻게 살고 계신지 알고 돌아가셨습니다. 누구라도 나서 까치가 되어 오작교를 만들어야겠습니다. 혹시라도 이 글을 읽는 다른 조선(북한) 분들도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레나테의 나라 독일이 통일된 지 16년, 이제 홍옥근의 땅 한반도에서도 평화와 통일의 세계사적 물줄기가 도래했다면 그 흐름을 타고 그들이 다시 만나야하는 것은 그들이 누릴 당연한 권리이자 운명일 것입니다. 냉전체제 아래 두 개의 민족 분단이 빚은 한 조(한)-독 가정의 사랑과 이별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재회라는 마지막 장이 남아있습니다. 예나의 홍 할머니는 오늘도 저녁이면 텔레비전을 켜고 뉴스에서 한반도발 평화와 화해, 만남과 통일의 새 소식들이 들려오기를 기다립니다. 그리고 홍 할머니는 이미 조선(북한)과 한국 관련 여행 책자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45년만의 재회를 위하여!

독일 예나에서 이동기 올림
Posted by 동그라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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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나테 홍

전망 좋은 방 2008. 10. 5. 23:23

NYT “사랑이 냉전의 벽 녹여” [중앙일보]

세계 유력 언론들 큰 관심

미국 유력지인 뉴욕 타임스(NYT)는 10일 기사에서 레나테 홍 할머니와 홍옥근씨의 47년 만의 상봉 소식을 상세히 보도했다.
47년 만에 생이별했던 북한 유학생 출신 남편 홍옥근(74)씨를 지난달 말 평양에서 극적으로 상봉한 레나테 홍(71) 할머니의 사연에 세계 유력 언론들의 관심이 쏟아지고 있다.

미국 뉴욕 타임스(NYT)는 10일 주말판 기사에서 “참고 견뎌 온 사랑이 냉전의 벽을 녹였다”라는 제목으로 상세히 보도했다. 신문은 중앙일보가 제공한 사진과 자료를 바탕으로 1950~60년대 홍 할머니 부부의 만남과 이별, 그리고 최근의 편지 교환 내용과 기적적인 상봉 스토리를 생생하게 그려냈다.

워싱턴 포스트(WP)와 워싱턴 타임스, 유에스에이투데이와 유력 지역신문인 보스턴 글로브, 시애틀 타임스 등도 AP 통신을 인용해 홍 할머니의 평양 도착과 상봉 소식을 전했다. 미국의 지상파 방송인 ABC, CBS와 케이블 채널인 폭스뉴스도 홍 할머니 관련 뉴스에 촉각을 세웠다. 유럽 등 각국 언론들의 보도 경쟁도 열기를 더하고 있다.

지난해 8월 홍 할머니가 방한했을 때 2면 머리기사로 인터뷰 기사를 내보냈던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IHT)은 이번에도 3면 주요 기사로 “47년 만에 부부가 북한에서 상봉하다”라는 제목으로 비중 있게 다뤘다. 파리에 본사를 두고 있는 IHT의 한 관계자는 “당초 1면에 기사 게재를 고려했지만 올림픽과 조지 W 부시 대통령 방한 기사 등으로 지면 압박이 심해 3면에 배치했다”고 귀띔했다.

독일의 대표 신문인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FAZ)은 ‘예나와 북한 간의 사랑. 오랜 이별 후의 상봉’이라는 제목으로 홍 할머니의 남편 상봉 소식을 자세히 전하고 지난해 중앙일보의 보도 등을 언급했다. 독일의 공영 TV 위성채널인 도이체벨레(DW)를 비롯해 베를리너쿠리어, 미텔도이체차이퉁(MDZ) 등 대다수 지방지도 dpa·AFP 통신 등을 인용해 홍 할머니 부부 사연에 지면을 할애했다.

이 밖에 레나테 홍 할머니의 감격적인 상봉 소식은 스페인·네덜란드·벨기에·덴마크 등 유럽 각 지역은 물론 호주·터키·카타르·베트남·대만 등 중동, 아시아·태평양 지역과 멀리 남미의 아르헨티나에 이르기까지 지구촌 곳곳에서 보도되며 주목을 받았다. 지난해 홍 할머니의 한국 방문 시에 제작된 동영상이 올라 있는 로이터(www.reuters.com)와 유투브(www.kr.youtube.com) 사이트에도 최근 들어 다시 방문객들이 몰리고 있다.

◇DJ “독일판 열녀 춘향”=김대중 전 대통령은 12일 “레나테 홍은 독일판 열녀 춘향이라 할 수 있다. 북한 정권이 늦었지만 상봉길을 열어 준 것은 잘된 일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또 “중앙일보의 헌신적인 보도로 상봉이 결실을 맺게 된 것을 치하한다”며 “나도 다소나마 도움을 줄 수 있게 돼서 보람을 느낀다”고 덧붙였다.

이날 대한적십자사 이세웅 총재도 “반세기가량 헤어진 채 살아온 남편과의 극적인 만남을 가진 레나테 홍 할머니의 애절한 사연을 통해 혈육의 소중함과 이산가족의 애환을 다시 한번 더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유권하 기자
Posted by 동그라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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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험상궃은 사내을 궃이 내 블로그에다 올려놓는 까닭은....이 기사의 맨 아랫부분에 있는
말 때문이다....

“항상 기억하세요. 인생과 투자의 승자(winner)들은 스스로 자신의 인생 스토리 대본(script)을 쓰고, 대본 그대로 연기하고,이런 가운데 비로소 만족을 느끼는 사람들입니다. 우선 자신을 열정적(passionate)으로 만드는 게 무엇인지 파악하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이게 자유고, 힘이고, 결국 이기는 길입니다. 

(그는 이를 단지, "이기기 위한 격언"으로 말하고 있지만,)삶을 풍성하고 보람있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정말로 잊지 말아야할 멋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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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chosun.com/svc/news/www/printContent.html?type=text


오를 때를 기다리는 건 투기 오르게 만드는 건 투자” [정정내용 있음]
세계 부동산 주무르는 트럼프, ‘트럼프식 투자 비법’을 말하다
뉴욕=김현진 산업부 기자 born@chosun.com
 
▲ 도널드 트럼프는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성공 비법을 털어놨다. 그는“일단 그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아는 홈그라운드에서 시작하라”며“어딘가에 투자했을 때, 주변 사람들에게 화제가 돼야 성공 한 것”이라고 말했다. /블룸버그
그는 적어도 평범함과는 거리가 있었다. 30억 달러가 넘는 재산이며, 미인들로 가득한 그의 빌딩, 낙원같은 리조트와 골프장…. 트럼프는 여러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세상은 평등하지 않다’는 생각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누구든 부자가 될 수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엄청나게 똑똑할 필요는 없지만 어느 정도의 지적 수준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트럼프는 “평범한 사람에게 여기 책에 적힌 대로 따라 하면 부자가 될 거라고 말할 순 없다”며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한가”라고 반문했다.

그래서 질투심을 느낀 세상은 구태여 그의 헤어스타일을 짓궂게 조롱하는지도 모른다. 20대부터 유지해왔다는 그의 헤어 스타일을 놓고, 미국 뉴욕타임스(New York Times)는 ‘건축가가 비평하기에 딱 좋은 정교한 구조물’이라고 썼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사는 데 굳이 헤어 스타일에 신경 쓸 필요가 있겠어요?”라고 되물었다. 인터뷰 내내 그는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도널드 트럼프에게 부동산은 ‘산소’(oxygen)같은 존재

―세계적인 부동산 투자가로서, 당신이 보는 ‘돈 되는 부동산’의 가장 중요한 요건은 뭔가요?

“일단 ‘확장 가능성’이 극도로 낮은 곳이어야 합니다. 내가 맨해튼을 좋아하는 이유는 물(water)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도시가 더 이상 확장(spreading)하는 데 제한이 있죠. 그게 ‘물’이든, 개발제한 ‘법률’이든 간에 확장할 수 있는 공간이 한정된 곳이 희소성으로 인해 투자가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오클라호마의 경우 대지가 너무 넓어요. 주위에 개발될 수 있는 ‘빈 땅’이 너무 많죠. 내가 가진 땅이나 건물의 희소성이 상대적으로 적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곳엔 투자 안 해요.”

―부동산 시장과 주식시장, 어떻게 다른가요?

“부동산은 보통 면대면(face to face)의 거래들로 이루어지고, 사람들이 실물을 보고 구입합니다. 좋은 환경과 분위기를 직접 보고 해당 자산을 ‘원하게’ 되는 거죠. 좀 더 매력적인 곳에 자산을 갖고 싶어하는 수요가 있고, 기꺼이 그만큼의 가격을 지불하려 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해당 지역의 집값은 결코 떨어지지 않습니다. 이게 바로 내가 부동산을 좋아하는 이유입니다.”

―도널드 트럼프가 보는 부동산의 매력은 뭔가요?

“부동산은 만질 수 있는(tangible) 자산이죠. 또, 부동산이 헐값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400년 전 맨해튼 전체의 값이 얼마였는지 아세요? 불과 24달러였죠. 24달러! 상상이나 가세요? 그만큼 요지의 땅은 꾸준히 오름세를 보입니다. 때때로 거품이 빠지고, 또다시 열기가 달아 오르면서 스스로 가치를 높여가는 게 바로 부동산입니다. 부동산은 진화(evolve)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 매우 흥미진진하죠. 물론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아는 경우에 한해서….”

―하지만 자금의 대부분을 부동산에 투자하는 데는 그만큼의 위험이 따르지 않을까요?

“나는 기본적으로 어느 곳에 투자할 때 ‘여기가 과연 얼마나 오를까?’란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건 투기꾼(spectator)들이죠. 투기꾼은 가격이 오르면 오르는 대로 그만큼의 세금을 내야 하고, 내리면 내리는 대로 손해를 봐요. 조금의 돈을 만질 수는 있겠지만, 부자가 되지는 못하죠. 부동산 투자 시 가격을 생각하면 위험에 빠질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다면 부동산 투자로 큰 돈을 손에 쥐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나요?

“나는 ‘내가 여기에 뭐를 해서 돈을 벌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죠. ‘무엇을 해서 이 땅의 가치를 높일 수 있을까?’ 생각하고, 또 생각합니다. 끊임없이 자신의 창조력을 발휘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지는 거죠. 당신이 주식에 돈을 투자했다고 칩시다. 그러면 매일매일 주식 시세가 그날의 기분을 좌우하겠죠. 부동산은 다릅니다. 구입 후 일일 단위로 가격을 체크하는 게 아니라 기본적인 자산(asset)을 손에 쥐고 끊임없이 고민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마인드로 투자해야 합니다.”

―자신만의 ‘부동산 노하우’를 공개한다면?

“일단 처음엔 ‘작게’ 시작하는 게 좋습니다(start small). 나는 처음 필라델피아에서, 로버트 기요사키는 하와이에서 시작했습니다. 일단 최대한 자신의 지역에서 가까운 ‘홈 그라운드’에서 시작하세요. 누구보다 그 지역을 잘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고, 지역의 큰 이슈나 굵직굵직한 정보를 얻는 게 상대적으로 수월하기 때문이죠. 최고의 투자는 ‘누구보다 잘 아는’ 데서 시작합니다. 아마 처음엔 좀 몸으로 부딪쳐 실수도 해봐야 뭔가 보이기 시작할 겁니다. (웃음)”

―그다음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화제가 되는 빌딩을 만들어야 합니다. 트럼프 타워의 경우 1983년에 완공돼 역사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젠 뉴욕의 랜드마크 타워(landmark tower)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어요. 일반 투자자들도 마찬가지예요. 과연 내가 투자한 곳이 화제가 되고 있는지, 내 주위 사람들이 내가 어느 곳에 투자했다고 했을 때 화제가 될 수 있을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왜 거기에 투자했어?’라고 누군가 물었을 때, 내가 그곳에 투자한 이유를 그럴 듯하게 설명해 그 이유가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될 수 있어야 합니다.”

―당신에게 부동산을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산소(oxygen)? (웃음) 사람들이 가끔 물어요. 어째서 지금까지 번 돈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해서 부동산에 투자하느냐고. 대답은 간단합니다. 부동산 투자는 나에게 숨쉬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거예요. 나는 어렸을 때부터 무언가 무조건 높이 쌓아 올리고 봤어요. 블록(block) 놀이를 할 때도 무조건 내 키보다 높이 쌓아 올렸죠. 심지어 형 블록까지 빼앗은 적도 있어요. 항상 무언가 지을 때 ‘크면 클수록 좋다(the bigger, the better)’는 뚝심은 그때부터 있었던 거죠. (웃음)”

■ 트럼프는 투자할때 투명성을 본다

―많은 사람들이 ‘도널드 트럼프’하면 ‘투자’란 단어를 떠올립니다. 그렇다면 어디에 투자해야 돈을 벌 수 있을까요? 가장 유망한 투자처를 꼽는다면?

“이게 바로 함정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다른 사람에게 찾아가 ‘내가 지금 1만 달러가 있는데 어디에 투자해야 할까요?’라고 묻곤 합니다. ‘맨해튼에 이런 빌딩 멋지지 않을까요?’라고 물으면서 정작 뉴욕시의 구획법(zoning)조차 제대로 모르죠. 그렇게 되면 자신의 돈을 그대로 다른 사람한테 줘버리는 격이 되는 거예요. 부자가 되고 싶다면, 돈이 자신의 손을 떠날 때 그 돈의 향방과 운명에 대해 그 누구보다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뉴욕 시에서 건물을 세우려면? 개발업자는 도시 구획·대기권·세법 등에 관한 수천 가지의 사항을 알아야 해요. 나는 하룻밤 사이에 개발업자로 성공한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생각할 때 좋은 투자의 법칙이 있다면?

“내가 어느 곳에 투자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 중 하나가 바로 ‘투명성(transparency)’입니다. 속이 훤히 비칠 정도로 명확하고, 속임수(trickery)가 개입될 여지가 전혀 없어야 합니다. 투자의 위험성은 자신이 투자 대상을 제대로 볼 수 없을 때 가장 커집니다. 성공하기 위해선 원대한 비전을 통해 다른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이런 비전이 없기 때문에 바로 다른 사람에게 돈을 ‘줘버리는’ 실수를 범하게 되는 거죠.”

―당신은 책에서 뮤추얼펀드와 분산투자를 비판했는데, 여유 자금이 많지 않은 사람들에겐 결국 리스크 부담을 줄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닐까요?

“기억하세요. 세상엔 세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아예 투자를 하지 않는 사람, 지지 않기 위해 투자하는 사람(invest not to lose), 그리고 이기기 위해 투자하는 사람(invest to win)이 있습니다. 투자하지 않는 사람들은 ‘정부나 회사가 어떻게 해주겠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지지 않기 위해 투자하는 사람들은 투철한 저축 마인드(saver’s mentality)를 가진 사람들과 비슷합니다. 이들은 귀가 얇고, 항상 장기전을 생각하고, 뭐든 안전하게 가려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뮤추얼 펀드에 투자합니다. 돈을 잃지 않을지는 모르나 투자의 근본적인 목적, 즉 ‘부자가 되겠다’는 목표는 달성하지 못합니다. 이기기 위해 투자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공부하고 남들보다 더 잘 알려 하고, 결국 다른 눈을 지니게 되는 사람들입니다.”

―투자의 승자들이 되기 위해 뛰고 있는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조언이 있다면?

“항상 기억하세요. 인생과 투자의 승자(winner)들은 스스로 자신의 인생 스토리 대본(script)을 쓰고, 대본 그대로 연기하고 이런 가운데 비로소 만족을 느끼는 사람들입니다. 우선 자신을 열정적(passionate)으로 만드는 게 무엇인지 파악하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이게 자유고, 힘이고, 결국 이기는 길입니다.”
Posted by 동그라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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