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토의 중세 상인 이리스 오리고 지음|남종국 옮김|앨피|680쪽|2만8000원 1870년 이탈리아 피렌체 근처 소도시 프라토의 저택 구석방에서 먼지가 켜켜이 앉은 자루가 발견됐다. 500여권의 원장(元帳)과 회계장부, 300여장의 동업 계약서, 환어음, 보험증서, 선하증권, 개인 수첩, 수표와 함께 14만통의 편지가 나왔다. 14세기 프라토의 거부(巨富) 프란체스코 디 마르코 다티니(Datini·대략 1335~1410년)가 남긴 방대한 기록이었다. 젊은 시절 교황청이 있던 아비뇽에 건너가 장사로 큰돈을 번 프란체스코는 1383년 고향 프라토에 돌아온 이후에도 피렌체, 피사, 제노바, 에스파냐, 마요르카 등에 지사를 두고 무역사업을 확장시켜 나갔다. 프란체스코는 기록광이었다.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빵 한 조각만 먹으며 이틀 밤낮으로 쓰기에 몰두할 정도였다. 그는 평생 자기가 받은 편지와 사업 기록을 모았고, 지점 관리인들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명했다. 그리고 이 모든 기록을 한데 모아 자기 집에 보존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프란체스코의 기록이 발굴되면서 중세 지중해 무역의 실상을 세밀하게 들여다보는 일이 가능해졌다. 그의 기록은 르네상스 시대 초기 경제뿐 아니라, 정치와 문화, 복식, 음식, 언어, 일상생활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 경쟁을 촉발시켰다. 프라토의 저택에 소장된 프란체스코 초상화(사진 왼쪽).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 지방의 소도시 프라토 광장에 서 있는 프란체스코 디 마르코 다티니 동상. 왼손에 환어음 뭉치를 내밀고 있다(사진 오른쪽)./엘피 제공 아일랜드 출신 미국 여성 역사학자 오리고(Origo)는 14만통이나 되는 프란체스코의 편지 가운데 사생활을 담은 11만통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 그는 프란체스코의 성공적인 사업 수완뿐 아니라 부부의 결혼 생활, 집안 살림, 농장, 음식과 약, 흑사병과 참회 등 14세기 사람들의 일상을 촘촘하게 그려내고 있다. 오리고가 프란체스코 부부의 결혼 생활을 상세하게 묘사할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이게도 이 부부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아 오랫동안 별거를 했기 때문이다. 프란체스코는 스무살이나 아래인 아내 마르게리타에게 집안 대소사를 시시콜콜 잔소리했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을 잊지 말고 하고, 포도주 통을 잘 관리하고 가축을 잘 먹이시오. 매일 저녁 문을 잘 잠그고 불을 껐는지 확인하시오." 아내는 매일 남편 지시에 따라 집안일을 처리해야 했고, 결과를 알리는 편지를 썼다. 프란체스코는 아내의 일 처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친구 부인과 비교하는 글을 썼다. "귀도의 부인은 남편과 함께 산 34년 동안 남편을 성가시게 한 적이 없다오." 아내는 남편에게 "아내를 여관집 주인아줌마가 아니라 한 여성으로 대우해달라"며 항변했다. 마르게리타는 남편에게 당당히 맞서고 남편의 잘못을 과감하게 지적하는 여장부였다. 프란체스코 기록에는 마르게리타가 쓴 편지가 100통 넘게 포함돼 있다. 다티니는 평생 돈을 좇았고, 노예와 하녀들에게서 사생아를 낳는 등 방탕한 생활을 했으며, 음식을 절제할 줄 몰랐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인색하게 굴고, 힘있는 이들에게는 아부하는 그런 인물이었다. 그런 그도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행복하게 살지 못했다고 고백할 만큼 불행한 인생을 살았다. 프란체스코의 회계장부는 '신(神)과 이윤의 이름으로'라는 글귀로 시작한다. 당시 상인들의 삶을 좌우하던 목표가 돈과 신앙이었던 것을 보여준다. 평생 돈벌이에 집착하며 엄청난 부를 쌓았던 프란체스코의 노년을 괴롭혔던 것은 죄의식과 구원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1410년 8월 16일 프란체스코가 세상을 떠나면서 평생 모은 10만 피오리노에 달하는 엄청난 재산을 프라토의 빈민들에게 넘겨주고 신의 용서와 구원을 청한 것도 이 때문이다. 오리고는 프란체스코를 현대 기업인의 원조로 꼽는다. 다양한 사업 범위와 조직력, 국제적 안목과 변화에 대응하는 능력, 야망과 통찰력, 끈기와 욕심 등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조선일보 2009.9.19 김기철 기자
Posted by 동그라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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